위즈덤 프로젝트/히스토리(history)

근본부터 잘못된 십자군 전쟁

황희상 2018. 6. 27. 16:49
이번에 살펴볼 주제는 십자군 전쟁(서기 1096~1272년)입니다. 중세 교회에 복음적인 가르침이 흔들리자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신앙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아주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십자군 전쟁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잘못된 교리를 가진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으로 나아갔던 역사상 아주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 글 : 황희상, "특강 종교개혁사" 저자

 

유럽의 다국적군 십자군(十字軍, Crusade)” 창설

모든 전쟁이 다 비극적이지만, 특히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그런데 너무나 거대했던, 헛된 삽질이었습니다. 물론 십자군 운동의 긍정적인 부분을 말하는 학자들도 꽤 있으나, 그런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마치 자기합리화처럼 여겨집니다.

이 전쟁은 동양의 이슬람 국가들이 영토 확장을 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당시 교황이던 우르바누스 2(Urbanus II)는 유럽의 다국적군이라 할 수 있는 십자군을 결성해 예루살렘을 탈환할 것을 황제와 제후들에게 호소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성지(거룩한 땅)라고 부르며, 그곳을 회복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당연한 의무이자 신앙적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즉 이 전쟁을 거룩한 전쟁(聖戰)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이 단순한 영토분쟁이 아니라 기독교와 이도교 사이의 종교전쟁이자, 신자의 영적 전투라고 분위기를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중세 최악의 어리석고 끔찍한 전쟁이 되고 맙니다. 2백 년 가까이 끌어오며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어야 했던 이 처참한 비극은 결국 최종적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전략적으로 봤을 때 성공이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보통 여덟 번으로 구분하는 전쟁 시기 중에서 딱 한 번밖에 없습니다. 초반에 예루살렘 성을 탈환한 것, 단지 그뿐입니다. 그마저도 잘 지켜내지 못해서 얼마 후 되뺏기고 맙니다.

부끄러운 전쟁, 추악한 전쟁, 쓸모없는 전쟁

게다가 십자군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는 달리 전혀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습니다. 십자군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붙인 자들이 실제로는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 이야기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는 약탈과 살육으로 점철된 추악한 사건들로 가득하여 책 한두 권으로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인데, 단적인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예루살렘은 유럽에서 어마어마하게 먼 곳입니다. 병사들이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굉장히 길고 지루 합니다. 아무리 자원병들이라 해도 걷다 보면 힘들고 마음이 바뀌어서 가기 싫어집니다. 게다가 그곳에 가면 무서운 적군과 싸워야 합니다.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항상 엉뚱하게 잔머리를 굴리는 자들이 생깁니다.

, 우리 배에 무기와 병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굳이 성지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냥 지나가던 길에 옆에 있는 동네를 스캔해서 방어력이 낮아 보이는 곳을 공략하면 어떨까요? 말하자면 묻지마 약탈을 하는 거죠. 어떤가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제4차 십자군 원정입니다. 가라는 성지는 안 가고 중간에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그야말로 중세 유럽 역사상 최악의 막장 드라마가 실제로 펼쳐졌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안될 것 없죠. 애초에 의도가 불순했으니까요. 목적이 돈이었으니까요. “이교도에게 점령당한 거룩한 도성을 회복하자!”와 같은 명분은 허울뿐이었고, 실제 목표는 탐욕이었던 겁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자신들과 같은 기독교 국가의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탐욕만이 가득했습니다. 지휘관들은 그런 판단을 내리면서도 교황이나 황제에게 혼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CCTV도 없었고, GPS 레이더 기록도, 블랙박스도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허위 보고서를 올리고 적당히 뇌물만 바치면 끝나는 문제였습니다. 십자군의 이름을 걸고, 이게 말이나 됩니까? 전쟁은 모두 악하지만, 십자군 전쟁은 그야말로 교회의 부끄러움을 넘어서 온 인류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근본 문제가 뭘까?

사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동기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잘못된 교리가 작용했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예루살렘을 성지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교리입니다. 물론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라고 말할 수는 있으나, 그곳이 장소적으로 다른 땅보다 더 거룩한 곳은 아닌 겁니다. 그런 식으로 성지를 구별하는 것은 특정 장소를 신성시하는 미신적인 생각이며, 성속이원론(成俗二元論)이라는 잘못된 교리입니다. 성속이원론이란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완전히 구별하여 서로 섞일 수 없다는 개념인데, 이것은 세상과 교회,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등, 매사에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별하려는 태도를 낳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여전히 굉장히 많이 있어서 걱정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종교의 창시자가 태어난 곳이거나 혹은 죽은 곳 등은 이른바 성지가 됩니다. 그래서 자고로 성지순례라는 여행상품이 종교인들 사이에서 각광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도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가 활동하신 지역이므로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성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별은 불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성지는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그 삶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잘못된 교리가 당시에는 당연한 진리였고 누구도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전쟁 통에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비논리적이 되는 법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우습게도 적용 단계로까지 더 나아갔습니다. 병력을 모으기 위해 십자군 전쟁에서 목숨을 잃으면 순교자가 되므로 곧장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암암리에 전파되었습니다. , 이것은 분명한 사기입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테러범들이 폭탄을 몸에 두르고 자살공격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세뇌 작업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성경을 읽지 않고 교리를 배우지 않은 당시의 신자들은 저런 교회의 거짓말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물론 그런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면 온갖 동방의 진귀한 보물들과 성지 예루살렘에 있는 성물들을 전리품으로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욕심도 십자군 원정의 동기에 한몫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온갖 범죄자들, 부랑자들, 불량배들이 십자군에 참여하겠다며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군에 참가한 덕분에 사람들에게 순교자로 추앙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엉뚱한 대응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전쟁이 그나마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유럽인들은 생각이 복잡해졌습니다. 교회와 교황의 말을 듣고 엄청난 일을 저질렀으나, 결과가 영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교황과 종교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특히, 이것이 올바른 신앙적 행위라고 믿었던 수많은 순진한 성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뭔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믿었던 교회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 앞에 정작 교회의 대처는 더욱 문제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어떻게 대응합니까? ‘! 우리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반성하고, ‘올바른 신앙이 무엇일까?’, ‘과연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것이 신앙적인 행위일까?’, ‘그런 전쟁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영적 전투라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철저히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교회는 영 엉뚱한 일을 벌입니다. 실추된 권위를, 겉을 번지르르하게 포장하는 형태로 회복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음 호에서 관련된 이야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

 

이 글은 청소년 매일성경에 6부작으로 연재된 교회사 시리즈 중에서 다섯 번째 글입니다. 2016년 9-10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