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상 작가와의 만남
2020. 07. 09. 목요일. 오후 1시 @나눔교회
정리: OOOO교회 OOO목사, OOO전도사
제목: 그리스도의 중보의 유익을 전달하는 기관으로서의 교회
부제: 그 교회의 권세 아래 주어지는 은혜의 수단들에 대하여
※ 며칠 전에 경기도의 어느 교회에서 포스트 코로나 대응TF팀이 오셔서 2~3시간 인터뷰를 했습니다. 정리한 내용을 보내주셔서, 제가 문맥을 약간 가필하여 기록용으로 제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뭐, 늘 하던 소리, 뻔한 소리긴 한데, 그래도 보실 분은 보시기 바랍니다. 한 줄 요약하면, 교회여, 이럴 때 교리교육 잘하자입니다.
※ 대화 내용을 직접 녹취한 것이 아니라, 정리자가 나름대로 생각하며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문맥을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많은 교회들이 불안해 한다. 성도들이 떠나가고, 더 이상 교회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한다. 그래서 현재 교회들은 접촉이 되지 않는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에 주력 중이다. 유무선 상의 심방이나, 택배를 보내는 일이 그 예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사역의 본질일까?
사실 어쩌면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기존에 교회에서 주던 것이 크지 않았기에, 코로나 이전과 딱히 큰 차이를 못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코로나 시국이 찾아왔을 때 교역자들은 엄청 걱정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 잠깐 당황하긴 했으나 - 금방 이 상황에 적응했다. 성도들은 교역자들의 생각만큼 수동적이지 않다. (장로교인들은 더욱 그래야 함.) 어떤 성도가 해외 여행을 한 달 이상 다녀온다고 할 때, 우리가 그 사람의 신앙을 엄청나게 걱정하지는 않지 않은가.
코로나 시국이라서 무언가를 더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성도를 잘 키우면 된다. 성도들의 면역력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면, 그 답은 기본에 충실하는 길뿐이다.
포스트 코로나 대응이란 결국 교회론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말씀, 성례, 기도”. 이 은혜의 수단들을 교회가 어떻게 잘 감당할 것인지에 집중하는 일이다.
말씀:
<리모컨을 쥐게 된 성도들 -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은혜의 수단에 있어서 '말씀'이라고 하면 설교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코로나 시국에 설교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많이 생각했다. 부서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문제의 본질은 성도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우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고, 대부분 방법론만을 고민하고 있다. 본질이 발전하지 않는데 채널만 확보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성도들은 자구책으로 그들의 손에 리모컨을 쥐었다. 인터넷으로 설교를 골라 듣는다. 어쩌면 성도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교회를 옮겨갈 가능성도 크다. 코로나 상황은, 대책이 없는, 줄 게 없는 이들에게 리스크가 가장 크다.
진짜가 필요하다. 제대로 된 지성을 추구하는 교육이 중요하다. 물론 지성이라고 하면 거부감이 드는 경우가 있다. 과거의 개혁교회는 엘리트주의를 추구하곤 했었다. 엘리트주의의 한계는 분명 극복해야한다. 그러나 공부를 안 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당연히 막무가대로 “공부합시다!” 하면 모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참 지성이 흘러간다면, 그것이 진짜 대안이 되는 것이다. 기초적인 신앙 교육의 정보가 전달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교리교육이다.
성도들은 앞으로 1-2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교회 역사 가운데 이미 답이 있다. 바로 책을 읽는 것. 기독교 강요가 그래서 나온 책이었다. '기독교란 대체 무엇인가.' 막연히 책을 읽으라고 하면 다들 싫어한다. 그래서 목회자가 이를 도와야 한다. 커리큘럼을 제공할 수도 있고, 온라인 강독 식으로 비대면 모임을 가질 수도 있다. 다만 성도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식상한 대답이라는 것이 문제. 독서 인구가 낮은 것도 분명한 한계이다. 따라서 이를 영상 매체로 다뤄내고 흥미를 돋울 수 있다면. 그것이 어쩌면 이 시대에 목회자의 역할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성도들의 교육을 위해 목회자들이 다양한 고민을 했다. 언어와 번역의 문제도 그러하고 출판물의 다양한 크기를 고민하기도 하고, 설교단을 회중석 가운데로 옮기기도 했다. 이게 다 그런 고민의 일환이다.
<전문성을 갖춘 목회자>
그래서 컨텐츠의 개발이 필요하다. 목회자는 컨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모두가 유튜버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고퀄리티 컨텐츠가 핵심이다. 9개의 준비 안 된 설교가 좋을까? 1개의 대박 컨텐츠가 좋을까? 성도에게 후자가 훨씬 유익하다.
코로나 시국은 이것을 증명하는 시즌이다. 퀄리티를 높인 교육 컨텐츠로 성도들을 정신차리게 해달라. 역사 가운데 “공백”이 교회에게 제공했던 유익을 기억해보라. 지금이 기회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이 시기는 목회자가 지성인이 될 수 있는 기회다. 앞으로 1-2년 집중해서. 골든타임이다. 작가는 자료가 스스로에게 채워져야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목회자도 마찬가지 아닌가?
갈수록 성도들은 전문화된 목회자를 찾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사람들은 남는 시간에 맨날 유튜브 보면서 지적으로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다. 그렇게 스키마가 확장된 성도들은 기대치만 턱없이 커질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들이 교회에서 말이 많아도 최소한 설교를 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것 조차도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 주체가 스트리밍으로 설교만 공급한다 해서 되지 않을 때가 왔다. 말씀을 죄다 설교만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토론식 교육이 필요하다. 말씀이 ‘설교+a’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 추가 교육조차 일방적인 전달식 주입식 교육이 되어서는, 르 네상스 시대의 성도들에게 지적 유익과 만족을 줄 수 없다.
<직분론 재정립과 목회자의 과제>
이를 위해 가르치는 목사, 심방하는 장로에 대한 재정립과 확인, 역할 조정이 필요하다. 목사가 심방이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물론 목사도 장로기에 심방은 유효하다.) 잡무에 시달리는 오늘의 실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장에 할 일이 많다는 건 안다. 하지만 효율성을 따졌을 때 목사에게는 공부할 시간이 필요하다. 목사가 바빠서 공부를 못하면, 결국 피해는 성도가 본다는 것을 성도 그 자신들이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직분론이 중요한 이유이다.
행사와 사역 다 좋다. 하지만 본질이 어떤 것이 필요할까.를 고민하자. 어떻게 포장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디자인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목회자의 과제이다. 목회자 스스로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 어디까지 해야 할까. 웨민 대요리문답을 원문으로 공부하는 것. 최소한 거기서부터 시작해야한다.
물론 일을 줄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차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성도들을 설득하고 시간을 주면 내용이 좋아진다는 일종의 발전 샘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불안하게 감춰진 미래를 앞두고 우리는 보이는 만큼 걸어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 시기는 각 교회가 '각자의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거쳐야 하는 시기이다.
말하자면, 우리 몫의 종교개혁을 우리가 실제로 해 내야 하는 시기라고 봐야 한다.
성례 : 세례와 성찬
<교회와 성도의 공동체성>
성도들의 접촉 자체가 줄어들텐데 공동체성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이것도 본질에 관한 문제다. 왜 교회가 세상과 다른 공동체성이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왜 우리가 기독교인가?”라는 질문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 사회의 각종 이슈 앞에서 분열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보라… 이것을 신앙 공동체라 할 수 있을까? 한국 교회에 공교회성이 존재하는가 과연??
생각이 같다는 것이 교제의 본질이다. 사회를 바라볼 때, 이슈를 바라볼 때, 완전히 같을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그리스도안에서 공통점과 비슷함이 보여야 할 것이다. 성찬은 세계관이 같은 성도들끼리 우리가 한 몸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공동체성은 친밀도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에 있다.
세례와 성찬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 정립이 다시 필요하다. 그래서 다시, 교리교육이다.
개혁된 교회가 말씀중심의 교회라고 불리다 보니, 많은 이들이 설교만을 떠올리는데, 사실 성례(세례와 성찬)도 말씀이다. 설교가 귀로 듣는 말씀이라면, 성례는 눈으로 보는 말씀이다. 이 말이 신기하게 들릴 수도 있으나, 설교와 성례 이 두 기둥은 기독교 예배의 가장 핵심적인 두 축이다. 사실 예배의 모든 순서가 예배이다. 요즘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시기를 겪다보니 티가 나는데, 어떤 교회는 설교시간이 끝나면 실시간 시청자 숫자가 확 줄어서, 예배를 마칠 때 쯤엔 몇 명 안 남았다는 슬픈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면에서 볼때 성례는 설교보다는 코로나 상황에서 실현시키기가 훨씬 어렵겠다. 그러나 어떻게든 시행해야 한다. 보여주어야 한다. 볼 수 있어야 한다. 체험시켜야 한다.
설교는 당연히 성경대로 하여야 하겠다는 말에는 쉽게 동의하지만 성례와 말씀을 잘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말씀 뒤에 성례를 행한다.
<성례는 또한 성도의 교제의 의미도 담고 있다.>
특히 성찬은 말씀 안에서 성도가 함께 식사를 하는 개념이므로 더욱 그러하다. 예배 순서에 교제 시간이 있는데 이 순서가 원래는 성찬을 하기에 적합한 순서이다. 그러나 매주 성찬식을 하는 것이 번거롭고, 의미가 오히려 퇴색될 수 있으므로 평소에는 지금 하는 형식으로 간소화 하더라도, 성찬과 교제가 이어지는 개념이라면 하나로 통일해도 무방하겠다. 이게 다 그 본래의 의미를 잘 안다면 해결될 문제다.
성찬은 현실적으로 교회의 물리적 사이즈와도 관련이 깊다. 그런데, 과연 대형교회라서 성찬이 힘들까? 대형교회가 문제일까? 그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 없다. 따져보자면, 웨민총회 런던 1교구 제1교회의 성도가 7000명, 칼빈의 생피에르 교회도 7000명이 예배하는 대형교회였던 셈이다. 공동체성은 크기와 규모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 역시 사실상 교육의 문제이다. 세례와 성찬이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면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이 아까울까? 설교는 30~40분씩 하지 않나.
기도:
<교회 안에 드러나고 알려지는 교회의 복지>
코로나는 산업 구조를 바꾼다. IMF 때처럼, 사업을 접어야 하는 성도들의 등장. 이를 교회가 돕는 것이 실천적으로 성도들에게 드러나야 한다. 기도는 성도의 필요를 구하는 수단인데, 교회가 이에 대한 응답 통로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
청년에 대한 지원은 훨씬 쉽다. 투자의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교회가 청년들을 예산 소비그룹으로 보고 있는가? 자녀로 보고 있는가? ... 이 질문에 무엇이 옳은 대답인지는 분명하다. 참고: 슬로보여 지젝,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을 말하다>
포스트 코로나는 역설적으로 긍정적 미래를 꿈꾸게 하고 있다. 지금 서구 세계가 코로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역사를 알기 때문이다. 전염병 이후에 사회가 긍정적으로 급변하기 때문에.... 노약자 인구가 줄면 자기들에게 이익이라고 - 직접적으로 말은 않지만 다들 느끼고 있다. 인구가 감소하고 잉여자산이 생기고... 일례로 흑사병 이후에 유럽에 본격적으로 사치문화가 시작되었다.
코로나가 자본주의를 이길 수 있을까? 자본주의가 이긴다. 그런데 교회는 부정적 미래와 암울한 미래만 설파 중이다. 거기서 성도들은 인지부조화가 생긴다. 과거에 변화를 인식조차 하지 못해서 흑사병 이후에 교회가 힘을 잃었던 것을 기억하면.. 교회는 이 시기를 정신 바짝 차리고, 이럴 때 신자가 어떻게 다르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고, 실질적인 교회의 기능을 해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기도회의 횟수가 줄어듦에 신경쓰지 말고 실제로 성도들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들으려 하고 거기에 주목하자.
마치며:
교회가 정말 해야 할 일에는 외면하면서, 자존심과 형식과 쓸데없는 관행 붙잡는데 목숨을 걸고 있는 모습은 그만 봤으면 좋겠다.
한편,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도, 실제로 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엄밀한 개혁주의’라는 표현은 실제로 배운 것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뜻이다. 개혁주의 안에 너무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데, 진짜와 가짜가 섞여있다. 장로교회라고 한다면 웨스트민스터 총회 안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던 것들을 가장 잘 이행하고 실천하는 것, 그게 진짜 개혁주의다. 그래서 웨민까지는 가야 한다. 거기까지 가야, 당시의 논의의 끝을 볼 수 있다.
(그 실천은 똑같이 어렵다. 목사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개척이나 청빙은 결국 똑같이 힘든 것이라고 본다.)
언젠가는 교회의 목표가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넘어서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리포밍과 리폼드의 차이를 기억하자. 리폼드 없는 리포밍은 개혁주의가 아니다. 예정론의 실천적 적용,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 교회론, 십계명의 사회참여적 적용, 국가와의 관계까지. 이미 신앙의 선조들이 다지고 정리한 교리적 기틀을 우리 안에 녹여내야 한다. 그 핵심은 웨민 총회의 결과물에 있었다. 우선은 그것까지 가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이 성도들의 주중의 삶 가운데 실천적으로 나타나도록 교육하고 독려해야 한다.
거기까지 가야 진정한 포스트 코로나 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록: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How to) - 아래 카테고리의 포스팅들을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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