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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국제공항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당시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 심지어 "No Entry"가 무슨 뜻인지도 느낌으로만 알 뿐이었다. 환승 공항으로 들른 것이라 중간에 일단 입국용 보안검색을 받았다. 그런데 그 공항은 얼마 전 검색대에서 난동을 부리던 남자가 테이저건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공항이었다. 더군다나 당시는 비포 문재인 & 비포 BTS 시절이라 공항에서 한국인 검색이 엄격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의 작고 소중한 파우치(치약 칫솔 게비스콘 등이 들어있는)를 분실했다.
 
검색을 마치고 국내선 갈아타는 곳으로 이동했다. 긴장이 풀린 나는 가방을 아내 옆에 놔두고 화장실에서 똥을 때린 뒤 슬슬 공항 구경을 다녔다. 그러다가 저만치 아까 그 검색대가 보였다. 나는 아까 거기서 흘린 파우치가 생각났다. 혹시 바닥에 떨어져 있진 않은지 보려고 무심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내 시야에 잠깐 "No Entry"라는 문구가 스쳐 지나갔다. 애석하게도 나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머릿속에서 해석되는데 시간이 몇 초 정도 걸린다. 번역을 마치고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멈췄는데 (멈춰!!) 이미 내 오른쪽 발은 No Entry 구역 안쪽을 디딛고, 왼쪽 발은 공중에 떴다. 나는 백스텝으로 뒤로 물러섰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보안요원이 "NO!!!"라고 소리치며 나를 잡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유창한 영어로 "아임쏘리, 벗 아이..."라고 말을 시작했지만, 그 다음에 "나 방금 요렇게 내다보기만 한거여~ 너도 봤자나 금방 나 여기서... 바로 물러섰자나~"라는 말을 영어로 할 줄을 몰라서 어버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영어를 못해서 곤란해 하는 표정엔 별 관심이 없었고, 굳은 얼굴로 "노. 유 캔트 어쩌구..."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아내에게 손짓으로 나를 좀 도와달라고 하려고 손을 들었는데 갑자기 그 보안요원은 그런 나의 동작까지도 막았다. "아.. 데어 이스 마이 와이프...."라고 말했지만, 그래서 뭐??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는 인상을 구기며 "NO!!!"만 반복했다. 순간 아 여기는 뱅쿠버, 난동, 테이저, 사망.. 이런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쳤고, 살고자 하는 마음에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부터 나의 환장의 콩글리쉬 대향연이 시작된다.
 
"오케이. 왓 캔 아이두?" 보안요원은 나에게 손짓을 섞어가며 뭐라고 하는데, 대충 알아듣기로는 다시 시큐리티 존으로 가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시큐리티 존?? 오케이." 나는 다시 보안검색대 뒤에 줄을 섰다. 그 귀찮은 일을 다시 겪어야 되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다음 순간 나에겐 지금 가방은 물론이요 여권도 항공권도 휴대폰도 (칫솔도)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짐은 아내와 함께 '저 너머에' 있었다. 아내는 내가 이러고 있는 줄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고 말이다.
 
내 차례가 됐고, 검색 요원은 맨 몸으로 터덜터덜 오는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유어 백??"이라고 물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지만 슬프고 귀찮은 표정으로 저 너머를 가리키며 "오버 데어..."라고 말했다. "파든?"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마이 백 이스 오버 데어.. 위드 마이 와이프." 이해를 못하겠다는 그들에게 나는 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매우 진지하고 알기 쉽게 설명했다. "아이 얼레디 패스드 시큐리티존. 벗, 마이 미스테이크, 앤드 아임 히어 나우." 그는 빵 터지면서 "오케이, 유어 패스포트."라고 말했고 나는 역시 "오버 데어..."라고 말했다. "... 인 마이 백" 그러자 그는 자지러지게 웃으며 동료들에게 뭐라고 말을 했고, 그들이 모두 함께 웃으며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유어 티켓??" "오버 데어, 위드 마이 와이프..." "애니띵 두유해브?" "...에브리띵 이스 오버 데어 위드 마이 와이프..." 나는 정말 슬퍼졌다.
 
그들 중 한 명이 뭔가 떠오른 듯이 물었다. "왓 이스 유어 에어라인?" 겨우 알아듣고 말했다. "KLM..." 그는 나를 데리고 KLM 인포데스크로 갔다. 그리고 대략 '얘가 티켓이 없다는데 재발권 해줘라'고 말하는 듯하더니 나를 거기 두고 휭 떠나갔다. KLM 직원은 그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더즈 히 스픽 잉글리쉬??" 그 직원은 뒤를 돌아보며 공항이 떠나가라 외쳤다. "어 리들!!"
 
KLM 직원은 날 보며 매우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 "왓, 이스, 유어, 네이임~?" 잔뜩 쫄아있던 나는 "호..화아..앙...희..상.."이라고 말했고, 그는 한숨을 쉬더니 나에게 종이와 펜을 주며 뭐라고 말을 했다. 이름을 쓰라는 것인 줄 눈치로 알아먹는 나는 내 이름을 썼고, 작은 종이 쪼가리로 된 임시 티켓을 발부받을 수 있었다.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그걸 들고 다시 시큐리티 존으로 갔다.
 
시큐리티 존에 갔는데 아까 그 직원이 없었다. 나는 다시... "백??" "오버 데어... 위드 마이 와이프" "패스폿??" "오버 데어... 위드 마이 와이프"를 시전하며, 새로 받은 종이 쪼가리 하나를 가지고 검색대를 통과했다. 이 모든 과정은 열 시간처럼 느껴지는 한 시간이었다.
 
아내에게 다가가자 아내는 뭔 똥을 그리 오래 쌌냐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가까이 다가온 내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걸 보며, "여보, 왜 그래, 설사했어?" 라고 물었다. 차라리 설사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차마 내가 겪은 일을 곧바로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일단 아내를 부둥켜 안고 주저앉고 말았다....
 
이상, 2013년 뱅쿠버 공항에서 내가 겪은 슬픈 오버데어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