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년에 날(日)을 보내기가 어려워서 서적으로써 벗을 삼았을 뿐이니,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해서 하는 일이겠느냐."
이는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최만리가 한글을 가리켜 "새롭고 기이한, 일종의 재주에 불과하다"고 평가한 데 대한, 세종의 뒷끝 쪄는 답변이다. 얼핏 보면 "심심해서 해봤는데 너무들 하네.." 정도로 해석되지만, 그런데 이 문장은 세종의 재치 넘치는 반어법으로 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즉, 이를 풀어 쓰면 이런 말이 된다.
"뭐? 일종의 재주?? 그러니까 너는 내가 뭐 늙어서 한가해서
그렇게 수많은 시간동안 그 엄청난 고전을 다 읽고 파악하고 분석해서
이 작업을 해낸 걸로 아는 거냐??
새로운 걸 제대로 만들려면, 그만큼 오히려 옛 것을 얼마나 제대로 파야 되는지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냐?"
세종이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서 얼마나 어마어마한 학문적 노력이 들어갔는지는 집현전 등을 동원한 데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최근 연구에 의하면 집현전 학자들도 세종에게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세종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작업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세종의 학문적 업적과 집착(?)은 엄청났다. 그런데 그걸 신하가 "잡다한 재주" 취급했으니, 빡이 돌아 안돌아...
세종의 답변 전체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너희들이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배된다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느냐. 또 이두를 만든 본의가 백성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느냐. 만일 이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했다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 아니냐."
여기까지는 논리적인 메인 반박이고, 그 뒤로 이어지는 반박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ㅎㅎㅎ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군상(니네 왕-_-)이 하는 일은 나쁘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또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 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해석 : 오냐오냐 해줬더니, 아는 것도 1도 없는 애들이 위 아래도 없지??
"또 소에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라 하였으니, 내가 만년에 날을 보내기가 어려워서 서적으로써 벗을 삼았을 뿐이니,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해서 하는 일이겠느냐. 또 이것은 전렵으로 매사냥을 하는 따위가 아닌데, 너희들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그리고 또 내가 연로하였으므로 국가의 서무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조그마한 일이라도 참여하여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일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들에게 일을 맡겨야 한단 말이냐. 너희들은 시종하는 신하로서 나의 뜻을 환히 알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옳으냐."
해석 : 너희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 줄 알면서도 그러냐? 그럼 내가 뭐, 매사냥이나 다니고 그럴까?? 어디 한 번 본격적으로 뛰어봐?? 주 120시간 야근 콜??? ... 살살 해줬더니 빠져가지고...
계몽주의 시대에 알파벳 순서로 백과사전을 만들었던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를 왕족/귀족들이 심히 불쾌해 했고, 심지어 신학자들은 감히 "지식"을, "신에 관한 내용"부터 정리하지 않고 알파벳 따위의 순서로 배열했으니 참람하다며 비판했던 것을 보면... 결국 수구적 마인드로 지식을 권력화 하려는 인간의 탐욕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에휴.
교리문답의 보급, 종교개혁 사상의 대중화 등, 일반 신자들이 교회에서 지식을 "나눠 갖도록" 하는, 나름대로 위와 유사한 작업에 손톱만큼의 힘을 잠깐동안 보태봤던 내 경험으로 봐도, 이런 벽들을 참 많이 느꼈었다. 지식을 독점하고 그걸 통해 권력을 영속하려는 자들은, 종국에는 그 지식의 근본이요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일 뿐, 그들이 받을 상급은 직무유기죄에 해당하는 형벌 밖에는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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