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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프로젝트/캐터키즘(catechism)

십계명은 압축파일이다! (월간 RE)

월간 RE 2016년 1월호 /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해설 - 24

 

지난 글에 이어서, 이번에는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이 요약된 십계명을 다룹니다. 여기서부터 몇 회에 걸쳐 '십계명'을 꽤 오래 다룰 예정입니다. 대교리문답은 십계명을 제1계명부터 곧바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 전에 먼저 십계명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문답 번호로는 98문과 99문에 해당합니다. 저 역시 교리문답의 문맥을 존중하여 십계명의 해석 방법론을 자세히 다루려 합니다. 반면에 십계명 그 자체에 대한 해설은 최대한 간략히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리문답을 스스로 분석하는 실력을 키우려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계명 각 문답의 해설을 자세히 살피기보다는 이렇게 해석 원리 중심으로 풀어가려 합니다. 우리 모두 다함께 '십계명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입니다.

 

십계명은 압축파일이다!

 

글: 황희상 / ‘특강 소요리문답’,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저자

 

신앙생활에는 규칙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위해서 규칙이 있었던 것처럼(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2),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도 역시 규칙이 필요합니다. 우리끼리 알아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방법까지 하나님께서는 마련하셨습니다. 그 규칙이 바로 도덕법이고, 도덕법은 십계명에 요약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의심을 해보셔야 합니다. 그 높고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고작 몇 줄밖에 되지 않는 십계명 안에 다 담길 수 있다는 것일까요? 게다가 십계명은 “~하지 마라”, “~하지 마라를 반복하는, 단순무식(?)한 고대의 문서가 아닌가요? 그런 문서가 어떻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규칙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정직한 의문을 품고 대교리문답을 대해야 합니다.

 

믿는 대로 행동하라 : 실천을 강조하는 대교리문답

대교리문답 2부에서는 전체 교리문답 분량의 3분의 2에 달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도덕법과 십계명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실제로 십계명에 대한 대교리문답 해설은 본문 전체에서 단일 주제로서는 가장 큰 비중인 66%가 할애되었습니다문맥의 흐름을 보면, 먼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가 하나님께 인간이 순종하는 것임을 밝히고, 그 순종을 위한 규칙으로 도덕법을 주셨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도덕법이 십계명에 잘 요약되어 있다고 말합니다(앞의 그림 참조). 마치 압축파일처럼, 도덕법이 십계명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거꾸로 압축파일을 풀면 그 단순한 십계명 안에서 풍성한 도덕법의 내용이 풀려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글자 그대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를 이끌어내어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교리문답이 십계명을 다루는 방식은 독특합니다. ‘성도의 삶의 규범으로서의 십계명을 자세히 소개하되, 각 문답의 답변 방식을 지켜야 할 의무금지된 것으로 나누면서 굉장히 실천적인 용어로 설명합니다. 마치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윤리 혹은 사회참여의 영역에서 다루는 항목과도 유사할 정도로 현장감 넘치는 단어들이 대교리문답 속에 '무수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소교리문답과 달리, 특히 대교리문답은 장년 성도들에게 더 풍성한 적용점을 제시하고, 각종 도전해 오는 시대 정신에 대항하는 구체적인 성경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보니 답변이 굉장히 길어집니다. 의무와 금지 조항으로 나누어, 영어 원문의 경우 콤마(,)”콜론(:)”세미콜론(;)”까지 동원되면서 많은 조항을 나열하는 형태를 취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독자의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들만큼 확장되기도 합니다. 5계명 해설의 경우, 계명을 지킬 대상을 단순히 부모로만 한정하지 않고, 손윗사람, 손아랫사람, 동년배, 이렇게 세 유형으로 구분해서 자세한 해설을 해주고 있습니다.

, 남의 이야기는 백번 들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정말로 그러한가 직접 본문을 봐야 합니다. 하나만 골라보죠. 9계명 해설(144, 145)을 보십시오.

 

144. 9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입니까?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과 이웃의 명성을 내 자신의 일처럼 보존하고 북돋우며, 적극적으로 진실을 옹호하며, 재판과 판결에서 뭐든지 진심으로, 성실하고, 자유롭게, 명백하고, 충분하게 진실만을 말하며, 이웃을 사랑으로 평가하며, 그들의 명성을 사랑하며, 소원하고, 기뻐하며, 그들의 연약함은 슬퍼하고, 덮어주며, 그들의 은사와 은총을 기꺼이 인정하고, 결백을 변호하며, 좋은 소문은 흔쾌히 받고 나쁜 소문은 즐겨 받지 않으며, 고자질과 아첨과 중상하는 자들의 기운을 꺾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명성 또한 사랑하고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이를 옹호하며, 합법적 약속을 지키며, 매사에 참되고 정직하고 사랑스럽고 좋은 소문을 꾀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

 

145. 9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 이웃이 지닌 진실과 명성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듯 소중히 여기되 특히 공적 재판에서 그러한데, 거짓 증거를 제공하고, 위증하며, 고의적으로 악한 소송을 변호하거나, 진실을 외면하고 억압하거나, 불의한 판결을 하거나,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말하며, 악인에게 보상하기를 의인에게 하듯 하고, 의인에게 보상하기를 악인에게 하듯 하며, 문서 위조, 진실 은폐, 정당한 소송에서의 부당한 침묵, 악한 행위가 우리 자신들의 책망과 다른 사람들의 항소를 요구할 때 잠잠하며, 진실을 불합리하게 말하거나 그릇된 목적을 위하여 악의로 말하고, 그릇되거나 혹은 의심스럽고 애매한 표현으로 진리나 공의를 왜곡하며, 비진리를 말하고, 거짓으로 중상하고, 험담하고, 훼방하고, 고자질하며, 수군거리고 냉소하고 욕하는 것이며, 조급하고, 가혹하고, 편파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며, 사람의 뜻과 언행을 일부러 오해하거나, 아첨하거나, 허영과 자랑, 우리나 다른 사람을 과대 혹은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를 부정하거나, 작은 실수를 더 악화시키며, 자유로운 고백을 위해 호출된 때에 죄를 숨기거나 변형하거나 감추며, 약점을 쓸데없이 찾아내며, 거짓 소문을 내는 것, 악한 소문을 받아들이고 찬성하며, 공정한 변호를 못하도록 귀를 가리우는 것이며, 악한 의심을 품는 것이며, 누구든지 받을만해서 받는 신용에 대하여 시기하거나 배앓이 하며, 그것을 망치려고 노력하거나 바라고, 그들의 불명예나 추문을 반기는 것이며, 조소하는 멸시, 과한 칭찬, 정당한 약속의 파기, 좋은 소문을 전하는 데 게으름, 불명예를 초래할 일을 직접 실행하고 피하지 아니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못하도록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막지 않은 행위 등입니다.

 

여러분, 방금 혹시 교리문답 본문을 읽지 않고 그냥 지나오셨나요? 그러지 말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한 단어씩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직접 읽어보셔야 합니다. - , 어떻습니까? 굉장히 자세합니다. 그리고 또 무슨 느낌이 듭니까? 너무 상세하고 노골적인 설명이 붙어있어서 다소 질리는(?)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이렇게 된 이유는 대교리문답이라는 문서의 본래 작성 의도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만든 문서들 중에서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이 교리문답서는, 다른 문서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구체화 하지 못했던 내용들을 매우 자세히 나열해주었습니다. 이 문서에는 애초부터 성도로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을 구체적으로 돕고 실제로 행동 방향을 제시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구체적인 선을 장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 보십시오 - 노골적입니다. 맘 편히 읽기 민망합니다. 대교리문답의 십계명 해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사람은 양심에 털이 수북이 난 사람입니다.

실제로 이런 방식을 싫어한 사람들이 당시에도 많았습니다. 더 나은 종교개혁을 주장하던 청교도들을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며 나무랐던 사람들은 대교리문답의 십계명 해설이 마음에 걸림이 되었습니다. 죄를 너무 많이 지적하니까 기분이 상한다는 겁니다. 실천을 너무 자세히 말하면 귀찮아진다는 겁니다. 당시 종교개혁의 흐름을 마뜩찮게 여기던 잉글랜드의 성공회 귀족들(특히 장기의회 상원 의원들)은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이 의회에서 통과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 지도층이 실제로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해주는 경우는 드물어 보입니다.

오늘날 교회 교육이나 설교 강단의 분위기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언급하기보다는 다분히 피상적이고 내면적인 것에 그치고 있습니다. ‘개인 구원과 교회 에서의 신앙생활에 머무는 겁니다. 현실이 이렇다고 할 때, 이와 같은 대교리문답의 접근법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크다 하겠습니다.

 

실천하자! 그런데 무엇을?

좋습니다. 마땅히 믿는 바를 실천해야죠.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실천하라는 것일까요? 십계명의 핵심 주제는 신기하게도 앞의 대교리문답 1부에서 공부했던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그것은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주 우리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는 것을 배웠는데,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따름으로써 그분께 경배하고 영광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한 방법까지도 소개해주셨는데, 그 방법이 성경에 친절하게 소개되었으며, 특히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도덕법의 핵심 사상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전인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사의 시험에 대답하실 때 설명하셨던 바로 그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생각해보십시오. 뭔가 지키고 따르는 일의 방식이 사랑이라니, 멋지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분의 품 안에 우리가 거하고, 환난 날에 그 품으로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합니다. 그런 대단한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어요? 이제 우리의 삶(이 생에서와 내세의 영원한 모든 삶)이 어떠해야 하겠다는 소망과 다짐이 우리에게 자연스레 뒤따라야 마땅한 바입니다.

 

실천하자!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라는 단어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기 싫어서 억지로 하거나, 짐이 되거나, 응당 치러야 할 대가를 갚는 차원에서의 지킨다는 수준과는 아주 많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통해 늘 백성들에게 이야기하시던 말씀, 때로는 가슴을 치시는 듯한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돌아오라 돌아오라’,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하라 사랑하라말씀하셨던 그 마음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나를 가슴 절절히 느껴야 합니다. 사랑하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시며 교회도 그렇게 다니시기를 원합니다. 이익을 계산하거나, 자기만족을 위하거나,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거나 교회를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시편 119:47-48)”

 

정녕 그분께 순종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복입니다라는 고백을 내가 죽기 전에 진심으로 할 수 있을까요? 말로는 그렇게 표현할지언정, 만약 저에게 주어진 선한 환경이 모두 사라진다고 한다면 저부터가 그런 고백을 유지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소망할 뿐입니다. 아직 잘 모르겠고, 그런 고백이 입 밖으로 차마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자의 삶이 어떠한 것이구나, 적어도 어떤 방향이겠구나... 그런 정도의 인식은 끝까지 놓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그것을 끝까지 붙잡고 바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함께 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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