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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너는 독자 여러분의 교리문답 본문 관찰 실력 향상을 위한 하나의 샘플입니다. 여러분은 이 글을 통해 교리문답의  나무를 살펴보면서,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의 문맥에 익숙해지시기 바랍니다앞의 글에서 우리는 대교리문답 제57문부터 59문까지의 흐름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중보사역으로 얻으신 혜택이 무엇인지, 그 혜택에 사람이 참여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혜택을 받고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60문과 61문에 담긴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앞의 글을 보충하도록 합니다.

황희상 / 특강 소요리문답,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저자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유익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58)에 대해 공부하는 중입니다. 그와 관련해서 59문은 누가 그 유익을 받는 자인가를 물었습니다. 오늘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이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지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60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성의 빛대로 사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60문이 묻고 있는 사람은 이런 종류입니다.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분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그냥 본성대로 살아가면 구원을 받을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왠지 답이 쉬울 것 같습니다. 대답은 당연히 No. 그럴 수 없다가 되겠지요(cannot be saved). 이것은 쉽게 납득되어 길게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질문입니다. 지나치게 친절하게도 대교리문답 60문은 자세한 대답을 해주고 있지만, 사실 앞에서부터 문맥을 잘 따라온 독자라면 여러 말로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귀찮기만 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사상은 만인구원론이라고 해서 이미 교회사 속에서 거부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굳이 마련했을까요? (각주1. 혹은 보편구원론이라고도 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극도로 강조하여 세상 모든 존재는 구원받을 가치가 있다고 설명하는 이론이지만, 성경의 증거를 받지 못합니다.)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구원자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답이 없으며, 누구든지 자기 인생의 지혜에 의지하거나 대자연의 깊은 깨달음을 얻거나 그 어떤 잘난 이방 종교를 아무리 철저히 믿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택을 받을 수 없고, 앞의 59문답에서 언급한 구원받은 자들에게 은택을 적용하시는 바  복음에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도 그들에게서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당연한 질문을 대교리문답이 굳이 마련한 이유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 61문을 위한 일종의 예고편이었습니다.

61문을 봅시다.

복음을 듣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가?”

59문에서 그리스도의 은택 중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확인한 상황에서, 60문은 어쩌면 61문을 위해 일부러 배치해둔 질문이었단 생각이 듭니다. 교리문답 작성자들의 재치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주장일 것입니다. 하지만 질문자는 예리하게도 그럼 교회 안에는??”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다 구원 받나?” 와우! 이런 질문을 교리문답에 넣자고 누가 맨 처음 말했는지 궁금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꽤나 미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은 다름 아닌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인들끼리였을 테니까요. 도전적이기도 하며, 상당히 충격적인 질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대답은 더욱 충격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고

이 문답이 기록되고 인쇄되고 교회와 공립학교에서 가르쳐졌을 때, 속으로 깜짝 놀란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저 대답을 인정하기 싫었던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이 대답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우리 시대에도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교리문답이 작성될 당시, 수백 년간 거대한 세력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미쳤을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 예전들을 통해 당연하게 구원 받을 줄 알고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로서는 질문 자체가 실로 느닷없는 질문이었고, 답변 또한 당혹스러운 답변이 아니었을까요? 마찬가지로, 우리 중에도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 혹은 모태신앙인으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답변을 더 자세히 봐야겠습니다.

복음을 듣고 보이는 교회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고, 다만 보이지 않는 교회의 진정한 멤버만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

, 지금 61문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습니다. 교리문답을 읽을 때, 처음 나오는 단어가 있으면 잘 살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분기점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각주2. 이미 알고 있는 단어라고 해서 흘려 넘기지 말고,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앞뒤 문답을 뒤져가면서 정의문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이 단어에 대한 부연설명이 이후 어떤 식으로 상술되어 나가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이 바로 교리문답을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기술입니다. 이런 깨알 같은 팁은 꼭 기억해두세요!)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은 소교리문답과 달리, 교회에 대한 설명을 직접 다루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의 구조를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입니다. (각주3.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 신앙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대교리문답의 구조를 따라 공부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소교리문답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답변을 보니 교회에도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보이는 교회(유형교회)가 있고 보이지 않는 교회(무형교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에 대해 정확하게 정리를 해야 그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후 대교리문답 1부를 마칠 때까지는 모두이 교회에 대한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연합된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하여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연합을 이룬 선택받은 무리를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 부분은 대교리문답에 직접적인 정의가 나오지 않지만, 문맥을 통해 충분히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에 이러한 정의문이 담겨있습니다. 교회는 택자의 무리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매주 출석하는 교회는 겉으로 볼 때 도저히 택자의 무리라고 봐주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구분과 인식이 필요합니다. 교리문답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해줍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부족함 투성이의 교회는 보이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택자의 무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택하셨는지, 또 누구를 버리셨는지는 하나님의 감추인 뜻, 오묘한 뜻의 영역에 속하는 사안입니다. (각주4. 이렇게만 설명하면 마치 보이는 교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길 수 있겠으나, 이 역시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각각의 개념과 특징, 그리고 특권들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교회에 대해 정의할 때 이렇듯 누가 그 구성원인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동안 교회에 대해 단순하게 그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모임 정도로 정의했다면, 이제 그 이해가 좀 더 깊어져야 합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차원에서 보면 구약과 신약의 교회도 하나이고, 더 나아가 창세부터 세상 끝 날까지 모든 시대에 거룩한 공교회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자기 필요에 따라 임의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된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참된 진리요 길이요 생명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께 연합된 택자의 모임이 바로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한다는 사실, 무엇이 좋을까?

그러면 이런 구분이 왜 중요할까요? 그냥 말장난 아닐까요? 교회는 다 똑같은 교회이지, 그걸 굳이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로 나누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까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위로를 주기 위함이고, 우리가 소망을 아주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주님이 머리되신,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교회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상처투성이의 교회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상처받고 떠나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거짓이요, 회 칠한 무덤 같다며 교회를 욕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핵심적인 위로는, 바로, 보이지 않는 교회가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차원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바로 그 허물 많고 부끄러운 보이는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손길과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 역시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고 세상 앞에서 욕을 먹고 힘이 없어 보여도, 교회만 보면 답답함에 위액이 역류하는듯한 느낌을 받을지라도, 그러나 보이지 않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고, 그분의 교회는 순수하고 거룩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지막 소망입니다.

보이는 교회만 보면 답이 안 나올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겠다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마음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향할 때, 거기에 한 싹의 소망이 있고 비로소 평안도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자는 어떤 환란에도 그 끝을 놓지 않습니다. 세월이 더 악해져서, 마치 온 세상에서 참 교회가 다 없어지는 것 같아 보여도 끝내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성원(members)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결코 그 신앙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신앙생활, 교회생활, 말씀, 성례, 기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변함없이 확정된 자의 것이라고 믿을 때, 삶 자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며, 주님의 품어주시는 날개 안에서 안심하고 잠들 수 있으며, 참된 여유가 생깁니다. (확신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으로 넘어갈 차례입니다.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대교리문답 65문의 설명을 미리 보면, 보이지 않는 교회의 지체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특별한 유익에는 연합(union)과 교제(communion)가 있다고 합니다. 왜 이것을 특별한 유익이라고 할까요? 연합과 교제 말고도 다른 더 좋은 것이 많이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부귀영화라든지? ‘복권당첨이라든지? ‘건강증진같은 것...? 연합이란 택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joined)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모든 성도가 연결되는 것. 그가 우리의 중보자로서 머리 되시고 대장 되시고 모든 짐을 담당하십니다. 그리스도 그분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유익(Benefits)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그 한분만으로 우리에게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도 역시 감사입니다.

여러분도 감사를 느끼십니까? 교리를 공부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하나 깨달을 때 자연스럽게 감사가 뒤따른다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면서 감사함이 클수록, 핵심을 제대로 파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 자체가 우리가 볼 때 감당치 못할 만큼 아름다운 행하심이요, 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큰 복을 받은 자로서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고요.

하나님을 찬송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