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귀로는 많이 듣던 곳이다. 한번도 눈으로 본 적이 없고 발로 밟아본 적 없는 곳이지만 “안동 하회탈”이라는 두 음절로 너무나 많이 들어 익숙한 곳, 그래서 아마도 내 의식 없던 어린 시절 한번쯤은 아빠 목마를 타고 혹은 엄마 품에 안겨 지나치기라도 한 곳일 게야 싶을 정도로 살가운 지명이 안동이다. 그러나 나는 안동은커녕 근처도 가본 적이 없었다.
지도를 좍 펴놓고 내가 가본 곳마다 동그라미를 쳐본 적이 있다. 광주가 고향이라 전라도 땅 웬만한 곳은 죄다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서울에서 살면서부터는 경기도와 강원도 곳곳에도 족적을 남겼으며, 저 멀리 부산과 경주에도 잉크 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가운데 소백산 근처는 깨끗하게 뻥 뚫려 있는데, 아무 곳에도 동그라미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내가 왜 요 부근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것일까 싶어 도대체 어떤 동네인가 들여다보면, 그 한 가운데가 안동이고, 주변에 태백산, 소백산, 충주호, 속리산, 추풍령, 백암온천 등의 지명이 보인다. 꽤나 유명한 이름들이다 싶으면서, 한편으론 내가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자부해 왔는데 어림도 없다싶어 심술도 났다. 그래서 다음 여행 때는 기어이 그 한 가운데 동네인 안동을 뚫어 보자는 일종의 ‘정복 심보’가 이번 여행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매번 여행을 갈 때마다 그 지역에 대해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뭐라고 소개를 했는지 찾아보곤 했는데, 마침 셋째 권에 경북 안동 답사기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분량이 상당했다. 이 지역 답사는 크게 3구역으로, 즉 하회마을 쪽, 도산서원 쪽, 그리고 지례 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길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과연 무엇이 있기에... 모르긴 몰라도 쉽게 봐서는 안 되겠구나 싶어, 이번 여행에서는 그 중 한 구역만 보기로 애초에 일정을 잡고, 나름대로 동선을 그려서 그 근처의 것들을 넉넉한 시간을 들여 보고 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유흥준 교수가 답사기에서 극찬을 마지않은 ‘봉정사'와 '하회마을', 그리고 '병산서원'을 보고 오기로 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하남IC로 나가서 중부고속도로를 탔다. 하행선은 늘 한가하다. 시원스레 뻗은 도로를 죽 타고 내려가다, 호법IC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진입, 안치환 테이프를 들으며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렸다. 지도를 살피며 문막IC에서 다시 새로 만들어진 중앙고속도로 개통구간으로 진입하는 데까지는 순탄했다.
중앙고속도로는 춘천에서 홍천, 원주, 제천, 안동을 지나 대구까지 연결되는 요긴한 도로이다. 산악지방을 남북으로 단숨에 뚫는 거대한 고속도로인데, 내가 지나갔을 때는 중간에 아직 미개통 구간이 있을 때였다. 제천에서 풍기까지의 구간인데, 그것은 소백산맥 한 가운데의 큰 고개인 '중령'을 넘는 구간이다. 일반 국도로 이곳을 넘으려면 구비구비 좁은 길을 위태롭게 한 시간 가량 넘어야 하는데, 고속도로가 직선으로 뚫리면 핸들 한번 꺾지 않고 사오 분이면 지나가는 거리이다. 이 구간에는 특히 국내최장 터널인 중령터널이 있는 곳이다. 터널 길이가 자그마치 4.5km에 달한다. 서해안 고속도로에는 무려 7km짜리 연륙교인 서해대교가 있어서 바다 위로 마치 허공을 달리듯 한참을 지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 터널이 4km가 넘으면 그것 또한 명물이 된다. 마치 땅 속으로 한없이 파고드는 듯, 어지럼증 있는 사람들은 가벼운 착시현상까지 경험할 정도로 긴 터널이다. 아무튼 당시 이 구간은 아직 개통되지 않은 곳이라, 제천까지 35km정도를 달리다가 도중에 고속도로가 끊기게 되고, 여기서부터는 5번 국도로 나가서 깜깜한 밤길을 한참 달려야 했다. 그렇게 가다가 풍기까지 가서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인터체인지가 나오고 안동, 대구로 계속 직선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앙고속도로이다. 당시에는 사실 이미 도로는 완성이 되었지만 아직 차선이 그려지지 않았고 표지판 시설이나 휴게소 등이 마련되지 않아 개통이 늦어지고 있었다.
중앙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내려오다가 바로 이 미개통구간을 만나서 답답한 5번국도로 접어들어 기분을 잡쳤다. 낮이면 경치 구경에 오히려 즐거웠겠으나 밤에 가로등조차 없는 국도를 달리는 일은 아무런 즐거움 없이 피곤하기만 한 일이다. 처음엔 중앙분리대까지 설치되어 정리가 잘 된 국도 구간이라 편했는데 도중에 군데군데 공사를 하고 도로 폭이 좁아지면서 운전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하늘을 보니 산과 산 사이를 건너뛰는 거대한 고속도로 교각이 보이면서, 저것이 빨리 완공되어 이 고생을 덜 해야지 싶은 간절한 마음까지 들게 했다. 그러다가 도중에 우연히 눈에 띈 것은 어느 공사 중인 톨게이트 진입로... 물론 밤이라 공사 차량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진입로에 공사차량이 왔다 갔다 하느라 그랬는지, 톨게이트 입구가 활짝 열려있는 것이었다. 물론 불은 꺼져있었지만, 커다란 돌덩어리로 막아두어야 할 진입로가 뻥 뚫려 있자, 호기심도 생기고 또 국도로 계속 달리기가 지루하던 마당에 잘 됐다 싶어, 이곳으로 차를 꺾어 들어가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고 위험한 짓이었다.
처음엔 여차하면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길은 너무나도 잘 만들어져 있었고, 그야말로 ‘직통’으로 뚫려있었다. 긴장감에 상향등을 켜고 안개등까지 켠 상태로 아무것도 없는, 아무도 달리지 않는 개통되기 전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중간 중간 중장비들이 주차해 있었고, 겁도 났지만 계속 달려서 드디어 중령터널을 만났다. 정말이지 끝이 안 보이는 터널이었다. 요즘 만들어진 터널은 노란 나트륨 등을 쓰지 않고 초록색 빛이 환상적으로 밝게 나는 조명등을 쓴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터널 입구에 '국내최장터널'이라는 안내표지판을 본 것만으로도 기억에 남을 일이었지만, 채 완공도 되지 않은 터널을 남몰래 운전해서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보통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니었다.
터널은 정말 길었다. 한참을 달리고 또 달렸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왜 터널에 들어가면 맞은편 출구에 하얀 빛이 보이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 이 곳은 맞은편이 그저 까만 점으로 보였다. 곳곳에 대피소 또는 쉬어가는 곳이 마련되어 있었고, 환기구도 보였다. ‘데이라잇’ 또는 ‘화이트아웃’ 등의 영화에서 본 터널 모습이 생각났다. 외국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터널을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드디어 반대쪽 터널 입구가 나왔고, 곧장 내리막길이었다. 한참을 내려가자, 풍기IC로 빠져나가는 곳이 나왔다. 이대로 계속 더 가다가는 이제 정말 길이 막힐 것 같았고, 위험하단 생각도 들었으며, 이미 몇km를 긴장과 불안 속에 달려온 터라 계속 가면 바로 안동이지만 일단은 정석대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공사차량이 출입하는 우회도로를 따라가자 톨게이트 관리소가 보였다. 이러다가 벌금을 무는 건 아닌가 싶어 더럭 겁이 났지만 정작 더 놀랜 사람은 표 받는 곳에 서계시던 직원분이셨다. 미 개통된 도로에서 일반 차량이 유유히 달려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 저기를 넘어왔단 말이오?"
나도 내가 저지른 짓에 스스로 어처구니없어 하던 참이니, 지금 이 상황이 황당하기는 피차 마찬가지인 셈인데 이 아저씨는 차번호를 적는 등 난리 법석을 피운다. 관리소로 끌려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도로공사 명찰이 달린 직원이 나와서 어찌 된 영문인지를 재차 물었다. ‘나는 분명히 진입로 표시를 보고 들어왔다, 그런데 공사 중이더라, 그렇다고 고속도로에서 역주행을 할 수도 없지 않느냐, 그래서 계속 왔는데 터널도 있더라, 그래서 지나온 것 뿐인데 왜 그러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되레 큰소리를 치며, ‘사고 나면 어쩔 뻔 했느냐, 진입로 관리를 이렇게 허술하게 해도 되느냐’ 따졌더니 오히려 죄송하다고 쩔쩔매며 보내주신다. 우리나라에는 참 순진한 분들이 많다. 덕분에 나는 여행의 첫걸음부터 참 재미나는 경험을 해 본 셈이다.
다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안동까지 논스톱으로 도착했다. 지도를 보며 안동 시내를 달리다가 안동댐 근처 민속박물관으로 차머리를 향했다. 안동댐 기슭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안동 토속음식으로 식사를 챙길 심산이었다.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는데 마침 안동댐에서는 드라마 ‘왕건’ 촬영이 한창이라는 편의점 아저씨의 설명이 있었다. 오늘은 왕자들이 잔뜩 와서 밤새 촬영을 한다는 것이다. 얼씨구나, 촬영지까지 갔지만 이미 촬영이 끝났는지 갑옷을 입은 엑스트라 몇 분만 라면 국물을 들고 계셨다. 다시 내려와서 밤늦게 숙박 지를 정했다. 안동댐의 야경도 아름다웠지만, 다음날 아침 물안개 피어나는 안동댐의 정경과, 마지막 스러져가는 단풍 빛깔이 묻은 듯 남아있는 초겨울의 산과 들은 더더욱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침 식사로 안동 명물이라는 ‘헛제삿밥’이라는 것을 먹었다. 반찬 구성은 제삿밥인데 제사도 드리지 않고 먹는 제삿밥이라 해서 ‘헛’제삿밥이란다. 안동시에서 지정했다는 설명이 붙어있는 깔끔한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너무 이른 아침이라 음식점에 손님은커녕 청소하는 아주머니들만 분주했다. 그래도 식사가 될까요 물으니 잠시 망설이다가 정식으로 상을 차려주셨다. 그리고 청소하는 소음에 방해 될까 봐 식사를 할 동안 진공청소기를 쓰지 않으시는 여유를 보여주셨다. 이후 더 많이 경험했지만 안동 분들의 인심은 정말 후덕하다 못해 미안스러울 정도였다. 양반들의 고장이라 역시 달랐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라 경상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지만, 그 지방 특유의 자연의 맛에 한입 한입 놀라기도 하고 웃음 짓기도 하면서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
오늘의 일정은 유홍준 교수의 답사기를 거의 그대로 따랐다. 그분이 느낀 것을 나는 미처 못 느낀 것도 있고, 나는 그분이 쓰지 않은 이야기도 많이 쓸 터이니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5번국도로 나가 잠시 ‘제비원 석불’을 구경하고 곧장 ‘봉정사’로 향했다. 봉정사는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극락전이 있는 절집이다. 신라 때 창건된 절인데, 건물의 양식은 고구려 풍이니, 아마도 복고풍 유행이 불던 때에 지었을 성 싶다. 봉정사는 봉황이 머무는 절이라는 뜻이다. 절이 앉은 지세가 마치 봉황이 머물고 있는 듯하여 이런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봉정사 전망 좋은 곳에 올라 보니 과연 그 가람배치가 절 이름을 결정하리만치 큰 비중을 차지하겠다 싶었다. 나는 이런 저런 절에 많이 가 보았지만,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봉정사는 지금껏 본 사찰 중에 최고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묘미가 구체적으로 뭐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자연경관과의 어울림'에 있다고 하고 싶다. 절집 자체의 아름다움만도 아니요, 주변 경관의 수려함만도 아닌, 봉성사와 그 주변 계곡과 산세까지가 동시에 어울리는 조화에 아름다움의 비결이 있었다.
봉정사는 진입로부터 다르다. 낮은 산비탈자락을 따라 계단식으로 내려오는 논밭과 농가 사이로 구불구불 지나가는 농로를 따라 서행을 해야 하는데, 그 거리가 만만치 않다. 깊숙이 들어가서 만나는 곳은 봉정사 입구 주차장.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표를 팔고 있다. 주차장에서 봉정사로 가는 길은 갑자기 가파른 언덕길이 된다. 이곳에 들어서면 차는 1단 기어를 넣어야 하는데, 지나치는 솔밭을 보며 아차 싶었다. 이런 곳은 차를 두고 걸어서 들어갔어야 했다. 운치 있는 솔밭이 상당히 짙게 드리워져 있어 멋있을 뿐 아니라, 외부와 내부를 적당히 차단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노리고 언젠가 일부러 조성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런 ‘멋’이 늘 그립다. 요즘 사람들은 은근히 보일 듯 말 듯 가리는 미를 좀처럼 누릴 줄 모른다. 아무튼 그날은 차를 다시 후진시키기는 벌써 틀린 것이, 이미 힘들게 언덕을 오르기 시작해버렸고 뒤에 다른 차까지 한 대 따라붙는 바람에 내려서 걷지 못하고 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솔밭을 지나 일주문을 지나면서부터는 거대한 참나무 숲 속을 지나게 된다. 숲을 지나면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저 앞쪽에 돌담이 보이고 태극마크가 커다랗게 그려진 봉정사 대문(?)과 만세루가 눈에 한가득 들어온다. 걸음을 옮길수록 감탄이 터져 나온다. 크고 작은 돌로 계단을 만든 입구 바로 앞에는 멋지게 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마치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다. 소나무를 슬쩍 쓰다듬으면서 돌계단을 한 스탭씩 오르면 감춰져 있던 봉정사 앞마당이 눈에 조금씩 밟혀 들어오는 게 참 감칠맛 난다.
봉정사 극락전은 마침 보수 공사 중이었다. 그런데 인부가 깜빡 했는지 문을 잠그지 않았고, 그것을 또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는 나는 눈치를 봐서 문을 밀쳐 열어버렸다. 극락전의 아름다움은 내부에서 관찰할 때 제 진가를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야무진 건축물의 미랄까... 직접 그 안에 들어가 이곳저곳 한참동안 눈을 주고 카메라를 돌렸다.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봉정사는 그 이름부터 시작해서 모든 컨셉의 묘미가 건물과 구조물의 절묘한 배치에 있는 듯 했다. 대웅전과 극락전 마당은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대웅전 앞은 정말 단순하다. 아무 것도 없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다. 반면에 극락전 앞마당은 자잘한 재미와 아기자기함이 있다. 그만큼 단아한 구조에 미소가 절로 흘렀으며 곳곳에 귀여운 장면들이 눈길을 끈다. 이건 가서 보면 안다. 하나만 알려주자면, 극락전 앞마당 한 가운데에 있는 삼층석탑을 한번 보라. 단번에 ‘귀엽다’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아무튼 봉정사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대비되는 두 마당의 차이에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건축에 대해 잘 몰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절집에 오면 나는 건축물 보다도 이런 식의 ‘공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거기서 발견하는 조상들의 지혜랄까 하는 것을 마치 영화를 보다가 복선을 발견할 때와 비슷한 즐거움을 느끼며 음미하곤 한다.
봉정사에는 눈여겨 볼 마당이 하나 더 있다. 봉정사에 딸린 암자인 영산암까지 봐야 봉정사를 봤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봉정사 전체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이 영산암의... 역시 ‘마당’이었다. 영산암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를 촬영한 곳이라 한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재미있다. 수백년, 아니 거의 천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라 그런지 나무가 말라 비틀어져 썩어간다 싶을 정도로 오래된, 낡은 누마루 밑으로 입구가 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마당에 들어서면, 잠시 어리둥절 해진다. 유홍준 교수는 영산암 마당을 “뭔가 부산스럽고 분주하면서 그런 가운데 질서와 묘미를 찾으려고 한 흔적이 역연하다”고 했다. 정말 그렇다. 괴석들, 각종 나무, 꽃들이 심겨진 정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그마한)이 있고, 오밀조밀한 건물 넉 채가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마당에는 비 오는 날 밟고 지나가라고 돌로 징검다리까지 놓았다. 애들처럼 그 위를 깡충깡충 뛰면서 보니 정말 보면 볼수록 아까의 ‘귀여움’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전라도 사람인 내 눈에는 마치 소쇄원의 정경을 요만한 크기로 압축해 놓은 듯이 보였다. 참으로 다양한 감정 표현을 영산암 마당은 보여주고 있었다. 봉정사, 참으로 ‘이쁜’ 절집이었다.
봉정사에서 내려와 하회마을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학봉 김성일 선생의 종택이라는 간판이 보여 그 댁 앞에 차를 잠시 멈추었는데, 문 앞에는 진돗개 두 마리가 앉아서,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식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개도 개였지만, 남의 살림집에 불쑥 들어가기가 뭐해서 커다란 양반 댁 대문 앞에서 쭈뼛쭈뼛 기웃거렸더니 개 한 마리가 벌떡 일어나서 경계를 한다. 결코 짖지 않으면서도 그 시선만으로도 방문자의 태도를 조신하게 만드는 것이, 한눈에도 보통 개는 아닌 듯 싶었다. 개 눈치를 보며 몸짓을 조심스레 하면서 얌전히 양반댁의 담장과 대문, 그리고 앞마당을 먼발치로 구경했더니, '이놈이 함부로 구는 놈은 아니구나' 싶은지 이내 자리에 않아 딴 델 본다. 역시 양반 댁 종갓집은 기르는 개도 확실히 다르구나 싶어 감탄을 하고 있는데, 부엌문이 빠끔히 열리며 한복을 곱게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누가 왔나 내다보신다. 들켰다 싶어 순간 멈칫 하다가 꾸벅 인사를 드리니, 아 글쎄, 씨익 웃음 짓고 도로 문을 닫고 들어가시는 모양이 마음을 탁 편하게 해주었다. 가식 되지 않으면서도 결코 천하지 않은 편안한 그 미소가, 눈이 나빠서 먼 곳을 흐릿하게 볼 수밖에 없는 내 눈에도 선명히 들어와 박혔다. 마치, ‘들어와서 편하게 구경하고 가세요.’ 라고 말하는 듯, 그 미소 하나로 커뮤니케이션의 시작과 끝을 그저 마무리하시는 그 아주머니의 너그러움과 여유는 분명 종갓집 맏며느리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주머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신 덕에 용기를 내서 마당에 들어가 보았다. 개들도 주인의 미소를 보았는지, 제 할일 하면서, 낯선 놈이 집안에 들어서는데 신경도 쓰지 않는다. 잔디가 곱게 깔린 마당을 밟으며, 잘 가꾸어진 정원과 장독 몇 개를 보면서 안뜰을 거닐다가 문득 보니 툇마루에 할아버지 한 분이 족보쯤으로 되어 보이는 고서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읽고 계셨다. 분명 아까부터 내가 하는 꼴을 보셨으면서도 짐짓 모른 채 하시는 이분이 이 댁 주인이시구나 싶어 다시금 자세를 바로잡았고, 인사를 드릴까 하다가 그냥 슬금슬금 나와버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옛 양반댁의 품격과 품위를 한껏 느끼게 된 경험들이었다. 그것이 뭐라고, 지금까지 저런 커다란 종택을 유지하고 계시는 분들에 대한 존경과 함께, 뭐라 설명하기 곤란한 그런 '멋'에 감탄하며, 다시 차를 몰았다. 길가 곳곳에 보이는 기와집들의 정경이 저절로 넉넉함을 주어, 터프한 나에게 엘레강스(?)한 드라이빙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하회마을은 34번 국도를 달리다가 지방도로 진입하면 본격적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널따란 풍산 들판 너머에 자리 잡고 있다. 경북지방에서 가장 크다는 풍산들은 실제 면적으로 치면 내 고향 전라도의 그것들에 비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산골 동네인 이곳에서 보니 정말로 넓어보였고 풍족 풍만해 보였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래서 풍산, 풍산들인가 보다. 풍산들을 끼고 크게 한바퀴를 돌고 나면 하회마을 진입로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는 그야말로 완전히 '시골' 냄새가 난다. 진입로부터 민속촌 가꾸는 작업을 했는지 몰라도 표지판조차 현대적인 것이 없고 전깃줄마저 땅 속으로 묻어 옛 맛을 최대한 살렸다.
하회마을은 규모가 큰 민속촌이다. 민속촌 중에 내가 가본 곳은 내 고향 근처의 낙안읍성인데, 면적으로 치면 비슷할지 몰라도 하회마을이 훨씬 잘 보존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봉정사처럼 자연 경관과 어울림에 있어서 그 마을 배치가 탁월했다. S자 모양으로 굽이 흐르는 낙동강이 그러했고, 운치 있는 송림(이곳 말로 ‘쑤’)과, 송림을 마주하고 강 건너편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절벽과 모래사장과의 조화가 기가 막혔다. 굽이쳐 돌아가는 강의 바깥쪽이라 침식작용으로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생기고 반대로 안쪽에는 모래가 퇴적되어 있다. 하회마을의 오랜 한옥들보다도, 그곳에서 몇 백 년째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오신 류씨 분들의 살림보다도, 내 눈과 마음을 즐거이 해 주는 것은 주변 경관이었고 조화였고 그 내음새였다. 그리고 마침 신용카드만 믿고 현금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사람에게 비빔밥 두 그릇과 파전 한 접시까지 공짜로 대접하신 하회마을 사랑채음식점 주인아주머니의 인심도 좋았다. 문명의 산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있을 것으로 당연히 생각하고 카드 한 장 달랑 내밀려 했던 도시 놈의 어리석음이 민망했지만, 덕분에 이런 후덕한 인심을 또 한번 경험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복이라면 복이다.
하회마을 강둑을 따라 한바퀴를 돌면서 자연의 멋을 한껏 느끼고, 기품있는 송림에 들어가 푸파푸파 마음껏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깨끗한 공중화장실에서 똥도 한번 개운하게 누고는 가벼운 몸과 맘으로 오늘의 최종목적지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병산서원 가는 길은 비포장 자갈길인데, 서울에서 순전히 아스팔트 포장도로만 달리던 밍구가 간만에 생고생을 했다. 가는 길에 병산서원 근처 인가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을 태워드리는 통에 유홍준 교수가 말한 '걸어서 들어가는 병산서원 진입로'의 정취는 못 느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야말로 그림처럼’ 펼쳐지는 멋진 풍경들과 아리아리한 자연의 빛깔은 오랜 시간 내 기억의 창고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병산서원에 도착하여 닥치는 대로 하나하나 만지고 느끼고 즐겼다. 머슴뒷간, 만대루가 가장 먼저 눈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외삼문, 동재, 서재, 내삼문, 강당, 존덕사, 사당 등에 발이 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즐거운 인상으로 남는 것은 만대루... 내가 본 절집 중에 봉정사가 가장 인상 깊었다면 만대루는 내가 경험한 그 어떤 문화재보다도 더 인상 깊었다. 내 글재주로는 만대루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병산서원의 건축 핵심은 이 잘생긴 누마루인 만대루인데, 마치 주변 경관을 시원하게 끌어안아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의 마술을 보는 듯 하다. 이것이 인공적인 건축물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게다가 나는 만대루의 기둥에 기대섰다가 앉았다가, 급기야 애들처럼 눕고 뒹굴기까지 했으니, 마루의 실용적인 기능 또한 제대로 해 내고 있다 하겠다.
만대루에 오르는 통나무계단의 윗트, 만대루에서 앞쪽으로 보이는 강과 병풍처럼 가로막은 병산의 자태, 해가 넘어간 뒤라 진한 청자빛 컬러로 물들어가는 하늘, 그리고 그것들 모두를 배경으로 날아가는 까치 한마리... 진부한 표현이지만 별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그림같은 장면이었다. 서원 마당, 궤가 그려진 사당 문, 담장과 안뜰의 정겨움, 저녁노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병산서원만의 정취는 그 가운데 서있는 한 인간을 느릿한 카타르시스에 빠지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만대루에 앉아 수백 년 된 목재를 만지며, 냄새를 맡으며, 그 건축의 미를 느끼며, 이 구석 저 구석을 캠코더로 촬영하듯 바라보는 내 표정이, 어미 품에서 기분 좋게 잠든 강아지의 그것마냥 한없이 흐뭇하게 풀어져 있음을 스스로 발견하며 웃음 짓기도 했다. 석양에 비치는 낙동강 백사장을 보며 만대루에 올라앉았는데, 바닥이 조금 춥다 싶어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하늘에 별이 떴을 때니, 나는 그 순간 아마도 그 자연과 일체된 옛 건축물의 향기에 담뿍 취해버렸던가 보다.
그렇게 취해있던 내 눈에, 달리 분주히 움직이며 마당도 쓸고 하는 분이 보였는데, 서원 관리인 류시석 아저씨였다. 이분은 옛날 서원에서 학생들의 밥을 지어주던 건물인 서원 옆의 별관에서 민박을 운영하며 날마다 서원 관리를 당신 집 가꾸듯 하시는 귀한 분인데, 이분께 인사를 드리고 알은척을 하며(책에서 봤다며) 대화를 청했더니 부끄러워 하시면서도 응해주셨다.
"이 책을 보고 답사를 왔는데, 아저씨께서 이 책에 나온 그분 맞으시지요?"
"아, 그 책에... 제 이야기가... 쬐끔... 쬐끔 나왔지요. 허허..."
아저씨에게 병산서원에 대해 설명을 잠시 듣고, 이 좋은 곳에서 1박을 해보고 싶은데 가능하겠는지 여쭈었더니, 이렇게 공부를 하러 오시는 분께는 특별히 1박을 제공하겠다며 웃음지어 보이셨다. 그런데 마침 보일러가 설치된 방이 모두 예약되어서 없고, 구들장에 장작을 때야 하는 방뿐이라며, 여러 가지로 불편한데 그래도 좋다면, 온돌이 두꺼우니 미리 불을 지펴야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나오시면 오히려 영광이지 손 저을 리 없다. 이런 곳에 와서 불편함이 문제겠는가, 다만 지금 현금이 없으니 서울에 돌아가서 통장으로 방값을 넣어드리겠다고 했더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장작을 챙기러 또 바삐 사라지신다.
거처를 정한 평온한 마음에 다시 밖으로 나가 강변을 거닐었다. 해가 지는 어스름에, 강변의 정취 또한 보통 수준을 넘었다. 낮에 하회마을을 감싸고 도는 강가에서 본 모래사장이 이곳에도 더 넓게 더 깨끗하게 펼쳐져 있었다. 강 건너에 병풍처럼 바짝 다가서서 버티고 서있는 산이 병산이란다. 지형적 특성상 하회에서 본 것처럼 굽이쳐 돌아가는 강의 바깥쪽이라 침식작용에 의해서인지 깎아지른 듯 솟아있는 병산의 그림자가 강물에 파랗게 비친다. 강변에서 뭐라 소리를 치거나 말을 하면 메아리가 선명하게 돌아온다. 이름 모를 새소리가 메아리와 함께 들려오는 그 곳에서 아이처럼 이런 저런 소리로 깍깍 대며 한참동안 메아리를 불러내보다가, 눈썹같이 가는 초생달이 뜨는 것을 보고야 서원으로 돌아왔다. 아저씨는 저 아래 집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 저녁을 차려두었다며 가서 먹으라신다. 아까부터 돈도 없이 먹고 즐기고 방까지 구한 터라 어느 정도 뻔뻔해진 터이지만, 그럼에도 더욱 더 황송하게 온 식구가 나서서 메뉴도 묻지 않고 차려주시는 안동의 정식 식단을, 뜨뜻하게 데워놓은 방에서 또 한번 대하며, 그저 감사하고 행복할 뿐이었다. 벌써 몇 번째 경험하는 인심인가.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런 곳이 있다. 식탁엔 방금 꺾인 들꽃 한 가지가 곱게 꽂힌 화병까지 놓여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 보니, 내가 묵을 곳은 서원 앞마당으로 문이 나있는 서원 별관, 전통 한옥집 문간방이었다. 내일 아침 방문을 열면 깨끗하고 찬 공기와 함께 아침의 정경이 한눈에 확 들어올 것을 생각하니 한껏 기대가 되었고, 그런 기대는 다음날 아침 어김없이 두배 세배의 만족감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자리를 펴고 나서, 아궁이에 계속 장작을 넣고 계시는 아저씨에게 슬쩍 다가가자 아궁이 앞에 조그맣게 궁둥이를 붙이고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 장작불을 보고 마주앉아 도란도란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흙바닥에 그림까지 그려 가시며 즉석에서 하회마을의 유래와 탈춤의 역사에 대해 현지 특강을 해 주셨고, 그런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곳의 많은 분들의 수고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어서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아궁이 위에 걸린 가마솥은 눈물을 몇 방울 흘리더니 증기를 푸욱 푹 쏟아내기 시작했고, 아저씨는 이쯤 해 두면 내일 저녁까지도 뜨끈뜨끈 하다며 들어가셨다.
아궁이 불씨가 잔잔해질 때까지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쏟아지듯 눈 안으로 달려드는 우주를 바라보며 그렇게 행복한 여유를 만끽했다. 나 아닌 다른 내가 되는 것 같았다. 보석같은 빛을 뿌리는 초생달이 너무 일찍 져서 아쉬웠지만, 그 대신 달빛이 없음으로 해서 밤하늘의 은하수를 고삼 때 지리산 여행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대할 수 있었던 것도 오히려 주어진 행운이었다.
병산서원에서의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한 번 더 감탄한 다음, 아침 일찍 만대루에 한 번 더 올라 심호흡을 한 뒤, 온 길을 되짚어 귀경길에 올랐다. 어제는 지는 태양빛을 받아 그윽한 풍경을 보여주던 병산서원 진입로가 오늘은 뜨는 해를 맞아 찬란히 빛나고 있었고, 그것 역시 장대한 한 폭의 그림으로서 감히 카메라 필름 나부랭이에 그 광경 담을 엄두를 못 내게 만들었다. 역시 아침햇살에 눈부신 풍산들판을 다시 보며 슬로우 모션으로 차를 몰았다. 훤한 태양 아래 이루어진 귀경 길에서는 예의 모험을 할 배짱이 없어서 구비구비 중령을 넘어가는 국도 길을 택했고, 밤길에 느끼지 못한 환상적인 소백산맥의 초겨울을 온몸으로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국도에서는 천천히 경치를 구경하며, 과속단속 카메라도 다른 자동차도 안 보이는 시원하게 직선으로 뚫린 고속도로 구간에서는 가속기 패달을 끝까지 밟아보는 만용도 부리며, 이래저래 즐거운 드라이브를 즐기며 세 시간 반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몇 단락으로 적은 나의 안동지방 답사기가, 2박 1일(?)의 황홀했던 여행의 감동을 결코 1%만도 표현치 못하리라 예상하지만,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열망에 일필휘지로 적어본다. 안동지방, 특히 병산서원은 지인들과 함께 꼭 다시 가고픈 곳이며, 사시사철 그곳에 있고 싶은 곳이고, 나의 인생 중에서 꼭 한번쯤 기회를 마련해서 한 달쯤 장기 기숙을 하며 책읽는 곳으로 삼고 싶은 곳이다. 옛 유생처럼 만대루에 앉아 그 좋은 자연을 벗하며 자유롭게 탁 트인 정신으로 글을 읽는다면, 어찌 저절로 공부가 되며 저절로 시가 나오지 않으랴. 그러고 보면 옛 선조들이 그렇게 멋들어진 시를 써 낸 것도 그런 자연의 힘이겠지 싶다.
- 나의 안동지방 답사기. 여기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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