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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을 잘 마스터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눈으로 본문을 직접 관찰하는 것입니다. 남이 쓴 해설서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한 학습 방법이 아닙니다. 공부는 자기 주도적으로 해야 가장 효과적입니다. 스스로 본문을 관찰하라는 소리가 처음엔 무척 막연하게 들리시겠지만, 그것이 정도(正道)이며, 동시에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다만, 본문을 그저 무턱대고 읽는다고 되지 않습니다. 원리를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본문을 관찰하되, 지엽적인 것에만 눈을 두지 말고  나무를 동시에 봐야 합니다. 또한 앞뒤 문맥의 흐름을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 이 글은 월간지 RE, 2013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전제를 제시하는 도입부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은 제5문에서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언급한 뒤, 나머지 제196문까지의 교리문답 전체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5문까지를 함께 묶어서 설명했을까요? 1문의 역할은 분명히 배웠습니다. 6문부터는 본격적인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으로 들어간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2문에서 제5문까지는 전체 교리문답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이렇게 물으면 대단히 어려운 질문처럼 생각됩니다. 마치 논문 주제를 던지는 것 같아서, 대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습니다. “을 보면 쉬워집니다.

 

 

위 그림은 대교리문답 1~5문의 핵심을 요약해서, 논리적으로 재배치한 것입니다. 질문과 답을 간단히 요약했습니다. 맨 앞부분, [인간의 목적]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대한 부분은, 교리문답 전체의 <도입부> 혹은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문답의 서두에 왜 이런 부분이 필요할까요?

 

일반적으로 대교리문답을 1부와 2부로 나눕니다. 1부는 1~90문까지, 2부는 91~196문까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1~5문을 도입부로 따로 떼어서 생각한다면, 아래와 같이 조금 다른 구분을 해볼 수 있습니다.

 

도입부 : 1~5

- 앞으로 배울 내용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미리 밝히는 역할

1 : 6~90

- 성경이 가르치는 첫 번째,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믿어야 할 바

2 : 91~196

- 성경이 가르치는 두 번째,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바

 

, 도입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당신이 왜 동의를 해야 하는지, 그 근거를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확실하게 해두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리가 성경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 성경은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요약된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목적에 합당한 참된 인생을 살기 위해서 필수적이고 유일한 규칙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대교리문답의 도입부가 독자들에게 밝혀두려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전제가 동일하지 않으면 그 뒤에 아무리 좋은 말을 많이 하더라도 대화는 겉돌게 됩니다. 서로 다른 말을 끝없이 반복합니다.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같은 한국말을 쓰면서도 , 너랑 나는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그래, 집어치우자! 이러다 싸우겠다.” 이렇게 대화가 엇갈리는 이유는 대체로 서로의 전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교리문답 제1문에서 인간의 목적을 밝힌 뒤 나머지 부분을 건너뛰고 곧바로 제6문 이후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질 것입니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말이지, 성경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가르치냐면...”

듣던 사람이 말을 막고 따집니다.

왜 갑자기 성경을 꺼내시나? 누가 성경책 읽고 싶댔어?”

“......아니, 그러니까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니까...”

그게 왜 하나님 말씀이야? 사람이 쓴 책 아니야?”

“......아니, 그러니까......”

“%$#@!”

 

... 전제가 필요합니다.

 

 

또 다른 교리문답의 도입부

 

이렇게 전제를 먼저 제시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른 유명한 교리문답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먼저, 칼빈이 직접 쓴 교리문답을 살펴보겠습니다. 제네바 교리문답의 도입부는 제1문에서 제7문까지입니다. 1문에서 인간의 목적을 묻습니다. 질문이 대교리문답과 동일합니다. 대답은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이 첫 질문을 보완합니다. 왜 그러한가? 묻습니다. 보충설명입니다. 뒤이어 제3문이 나오는데 1문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표현으로 비슷한 것을 묻습니다. 인간의 최고선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역시 제4문이 앞의 질문을 보완합니다. 왜 그러한가? 1문과 2문이 한 세트라면 3문과 4문이 다른 한 세트입니다.

 

 

여기까지 대답을 듣고 나서 비로소 제5문이 마치 감탄사처럼 등장합니다. “(아하!) 하나님을 아는 삶을 살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겠구나!” 이렇게 분명하게 인생의 목적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섯 개의 질문을 할당하여 정의해줍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기독교 교육에서 출발점이자, 가장 큰 <전제>라는 것입니다. 그 뒤로 제6문이 등장해서, 그러면 그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알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 어디서 많이 본 대답이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의 제1문은 바로 이 제네바 교리문답의 도입부 전체를 한 개의 문답으로 기가 막히게 요약한 것임을, 눈치 빠른 독자는 지금쯤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제네바 교리문답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의 오마주(homage)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까지가 도입부라고 한다면, 뒤이어 아주 중요한 제7문이 나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올바로 영광 돌릴 수 있을까?” 여기서 대답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를 섬김으로 그의 뜻에 순종하고, 우리 모든 고난 중에서 그를 부르며, (우리 행복과 모든 선을 그에게서 찾으며 그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마음과 입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대답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보이십니까? 다음의 도식을 보십시오.

 

a.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  1부 믿음 : 8~130

b. 그를 섬김으로 그의 뜻에 순종하고  -  2부 율법 : 131~232

c. 우리 모든 고난 중에서 그를 부르며  -  3부 기도 : 233~295

d. 마음과 입으로 인정하는 것!  -  4부 예배 : 296~373

 

제네바 교리문답은 바로 이렇게 제7문의 답변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그것을 하나하나 해설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7문의 대답이 1~4부를 나누는 분기점이 됩니다. 7문이 무척 중요하겠지요? 만약 이런 식으로 숲을 보는 눈을 갖지 못한 채 본문으로 바로 들어가서 이해하려 든다면, 엄청난 핸디캡을 갖고 고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교리문답은 아예 본문 자체에 도입부가 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3부로 나뉘어 있다는 것은 많이들 아십니다. 그러나 원문에 제1문과 제2문이 따로 도입부로 구분되어 있고, 3문부터 본격적인 제1부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구조를 잡아주는 분기점

 

이렇듯, 도입부에서 먼저 전제를 제시하고 다음에 본론이 나오는 방식에는, 전제와 본론 사이에 어떤 특별한 역할을 하는 질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로 분기점 역할을 하는 질문입니다. 이 분기점을 발견하고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질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체를 보는 시각이 결정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에서 그 분기점은 제5문이 되겠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믿을 것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 대답합니다. 이어지는 제6문부터 그 두 가지 내용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5문이 분기점입니다.

 

제네바 교리문답에서의 분기점은 제7문이 되겠지요. 7문의 답변에 따라 교리문답 전체가 네 부분으로 나뉘는 모습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는 몇 번째 질문이 분기점일까요? 그렇습니다. 2문이 그 역할을 하지요. 복된 인생을 살기 위해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하고는, 그 세 가지를 설명하는 과정이 곧 교리문답 전체를 1~3부로 나누는 흐름이 됩니다.

 

 

대교리문답의 도입부: 전체 교리의 뿌리가 되는 성경론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이 다른 교리문답에 비해 특별한 점은, 도입부에 성경이라는 요소가 대단히 비중 있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리문답은 첫 질문에서 인간의 목적을 물어보는데, 그 대답으로 하나님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에 대해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중요한 출발점을 논하면서 별다른 논증 없이 성경만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런 독특한 도입부가 대교리문답의 특징입니다. , 대교리문답은 신앙 교육의 모든 질문에 앞서, 그 뿌리가 되는 성경에 대해 탄탄한 기초를 다지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1문의 대답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영광 돌린다는 말은, 단순히 무슨 시상식에서 하는 미사여구(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 이자벨 미용실 원장님께 돌립니다!)로서가 아니라, 매우 실천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과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거나, 세상의 가르침에 따라 적당히 중용의 도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문은 2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 정녕 그렇다면) 그 목적대로 살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느냐? 무엇을 봐야 하느냐? 우리의 공통 교과서는 뭐냐?” 답은 성경입니다. 오직 성경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이루어질 대화의 근거(전제)가 됩니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왔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대교리문답은 철저하게 그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신앙교육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는, 단지 하나의 주제가 아니라 나머지 모든 주제의 근거입니다. 왜 하필 성경일까요? 다른 철학도 많은데 왜 우리는 성경으로 합니까? 도올의 책이나, 철학 교수들의 책, 스티븐 호킹의 책으로는 왜 하지 않습니까? 양심도 있고 도덕도 있고 다른 종교도 많고 직접 계시를 받는다는 사람들도 세상엔 많고 많은데......?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를 보면 성경은 인간의 온갖 탐욕이 빚어낸 허구와 짜깁기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이건 일반적인 정서입니다. 오늘날 교리문답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아주 다양한 신앙적 배경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와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전부가 아니지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라면, 나머지 문답은 죄다 쓸모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흔들리면 다른 모든 신학적 주제는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대교리문답의 구조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교리를 배우고 나면, 하나님에 대한 건전한 궁금증이 생겨야 합니다. 바로 이어서, 성경에 대한 건전한 관심이 생겨야 합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싶어져야 합니다. 심지어 거기서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느껴야 합니다. 교리를 시작부터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사람은 올바른 길과 방법론을 추구하게 되고(성경), 전인적인 반응이 나옵니다(감사). 더 이상 교리문답을 그저 무턱대고 외우는 식의 공부가 계속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글: 황희상「특강 소요리문답(상/하)」,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