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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아버지가 가족모임에 공유하려고 쓰신 글이다. 따라서 본문 중 호칭은 나를 기준으로 할 때보다 1대 위가 된다. 즉, 여기서 증조할아버지는 나에게 고조할아버지가 되신다. 조상 자랑을 하는 것이 보기좋은 일은 아닐 수 있지만, 더 잘 해보겠다고 다짐하는 차원에서 블로그에 담아둔다. 다만 일부 디테일은 삭제하거나 보완하였다. 추가되는 정보가 있으면 아버지와 상의하여 수시로 업데이트 하기로 한다.

 

(황장규)를 기준으로 호칭을 사용하여 우리 가족의 신앙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조선, 전라도, 순천읍에 있는 향교에서 직강이라는 직함으로 유교(도덕)를 가르치는 분이 계셨다

황의국 고조할아버지 (1852-)는 그 신분에 어울리게 퇴근하여 동네 입구의 돌다리에 이르러서 에 헴--.”하고, 큰 기침을 하면 동네 사람들이 슬슬 피했다고 한다.

( 나는 그 할아버지의 큰 기침을 위세를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배려라 생각한다. 미리미리 피하거나, 옷매무새를 바로잡아 서로 민망한 모습으로 만나지 말자는 배려. 또 동네 사람들의 부도덕한 모습들을 보고 불편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진정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조할아버지는 일곱 아들을 두셨다. 그중에 둘째 아들이 나의 증조할아버지이시다.


1907,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순천에 도착하여 향교 뒤에 교회를 세웠다.

그때, 황성연 증조할아버지는 이 일을 미리 알았고, 선교사의 일에 협력하였으며, 가족들과 함께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증조할아버지의 형제 몇 분도 예수를 믿음.)

황성연 증조할아버지 (1876년생 - 1927년 돌아가심) & 이고진 증조할머니 (1876년생 - 1958년 돌아가심)

증조할아버지의 활동에 비해 기록이 남지 않은 것은 비밀 정보분야에 종사하신 것으로 생각됨밤이 되면 집의 높은 나무에 호롱불을 높이 달고, 어떤 분들이 찾아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침이 오기 전에 떠나심. (아버지 황상재의 증언)

증조할머니는 여수 화양면 고진리, 한약방 집의 딸로 시집올 때 많은 물품을 가지고 왔으나, 글을 배우지 않았고, 이름이 없으셨는지 친정 마을 이름을 따서 고진 댁, 고진 할머니로 불리웠고, 묘비에도 이고진으로 기록됨당고모(황숙자)가 어렸을 때, 그 증조할머니와 한방에서 지낼 때, 할머니는 성경을 많이 읽으셨고, 기도를 꾸준히 하셨다고 하시며,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나님께 죄송하다. 주일에 교회에 갈 때,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논꼬랑 길로 보이지 않게 엎드려 기어서 갔던 것이 하나님께는 부끄럽다.” 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증조할머니께서 글을 몰라 아들들이 글을 가르쳐 주었는데, 특히 둘째 아들이 따복 따복 잘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셨다. 그중에 둘째 아들이 나의 할아버지이시다.


1. 황종식 큰할아버지 (1896. 9. 2- 1940. 5. 6) & 김구암 할머니 (1898. 5. 1- 1973.12.31)

자녀: 맛디, 사래, 룻기, 황신득, 황영재, 황갑재 (황종식 큰할아버지는 딸들의 이름을 성경속의 인물들의 이름으로 지은 것으로 보아 집안의 믿음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2. 황봉식 할아버지 (1900. 4. 6 - 1930. 7.29) & 정갑엽 할머니 (1903.12.29- 1995.12. 5)

자녀: 황상재, 황신애, 황세재, 황정애

황봉식 할아버지는 어머니께 한글을 따복따복 잘 가르쳐 드린 착한 아들이고, (증조할머니 증언교회교육에 성실히 참여하고,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며, 주일학교 학생을 가르침. (고 최정완 장로의 증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온젼히 외옴 증셔(1917년), 특강 소요리문답(흑곰북스) 상권 p.408 참조
사경회 참석 및 진급 증셔(1920년)
선교사가 설립한 순천 매산학교 1회 졸업생. 졸업증서(1922년 3월)

 

1922, 교회 다니는 사람을 배우자로 삼기로 하여, 광양의 교회에 다니는 처자와 결혼함.

192410, 아들이 태어나자, 아들을 잘 키워 중국에 선교사로 보내겠다.”고 의지를 나타냄(황애덕 고모할머니 증언)

당시 신문에 순천기독 주최 하기아동강습회 강사로 활동한 기사가 있음.

순천중앙교회 산하에 순천중앙유치원을 설립함. (나 황장규는 설립자의 손자라는 이유로 월사금 없이 유치원에 다님)

순천지역 청년 항일 계몽단체를 조직해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음.

이후 코이트 선교사의 활동을 가까이 돕다가(조사),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구례에 새로 생긴 교회(광의교회나 산월교회로 판단됨)의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일본 고베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구례의 교회명과 입학한 신학교는 정황 증거로 분석한 이재근 교수의 도움으로 추정한 것이다.)

유학 중 고베 대지진으로 전염병이 유행하여, 신학생들이 봉사활동을 갔는데, 그 곳에서 병을 옮아 일본에서 치료를 하여 나았으나, 마침 방학이 되어 귀국하였는데 병이 재발하여 돌아가셨다. (황애덕 고모할머니는 오빠가 신학 수업을 다 마쳤으나, 35세가 못되어 목사가 되지 않은 채로 돌아가신 것이 한이 되었다고 표현하심.)

 

3. 황창식 작은 할아버지 (1902. 3.11- 1968.10.28) & 김처례 할머니 (1908.12.20- 1951. 4.14)

자녀: 황광재(장로), 황기재, 황양재, 황숙자, 황영일

황창식 작은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시고, 소금판매업, 정미소를 운영하셨다1930년에 둘째 형이, 1940년에 첫째 형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모시게 되고, 둘째 형의 아들 둘을 맡아 기르게 됨.

 

4. 황애덕 고모할머니 (1908-1992)

황애덕 고모할머니의 남편에 대한 정보는 없고, 1945, 해방 후 순천중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고, 손양원 목사님의 옥살이를 돌보는 등, 교회에 열정을 가지고 시무함사위가 인천에서 잡혀간 후, 큰딸은 재혼하고, 외손 세 남매를 7, 3, 1세 때부터 길러서 결혼시키고, 미국에 갈 때까지 양육함.

친정아버지가 시집갈 때 사주신 재봉틀(손으로 돌리는 싱거 미싱)로 순천중앙교회 성도에게 많은 옷을 만들어 줌.(그 재봉틀은 최종 소유자 황장규가 순천중앙교회에 기증하러 갔는데, 교회형편이 받을 환경이 못 된다고 해서 순천기독교박물관에 임시로 보관함.)

1958년 순천중앙교회 전도사 사임하고 광주양림교회 전도사로 부임함. 광주로 떠나는 황전도사를 환송하기 위해 순천역을 가득채운 성도들이 눈물로 환송함 : 서미순(황애덕 전도사의 외손녀) 누님의 증언

* 이메일 내용 캡쳐

 

1963, 다시 순천으로 가서 매산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 매산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을 지내고, 일생을 집안의 믿음을 후손에게 전하는 일에 힘쓰다가, 주의 이일성노원, 베데스다 요양원에 계시다가 1992년 소천하심.


아버지(황상재), (1924 - 2015)


(황장규 장로) (1948 - )


아들(황희상 작가) (1976 - )

아들 황희상은 "특강소요리문답",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특강종교개혁사"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