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과거에는 보통 바빙크의 교회론을 "하나님의 큰 일"에 나오는 "교회" 챕터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 (쿨럭) 그런데 아시다시피 바빙크는 하나님의 큰 일을 신학자들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큰 일 교회 챕터에서 바빙크는 "통치"에 대해서는 아주 약하게 다루었고 "권세"에 대해서는 거의 제거해버렸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부족하기 쉬운 부분을 보충하고, 원래 바빙크의 마음에 품었던 교회론을 보자는 차원에서 교의학 제4권의 해당 파트를 정리해 봅니다. 부디 이 자료를 통해 저 두껍고 묵직한 바빙크 교의학에 그래도 한발짝 다가갈 용기를 내시기를...
끝으로 이 자료를 공짜로 푸는 이유는, 더 많은 분들이 달라붙어서 건전한 교회론을 자알 정립하여, 오늘날 우리 이 척박한 이 땅에 멋진 열매를 맺어 주십사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한떨기 가녀린 성도의 소망이자 부탁입니다. 제발, 우리의 미래를 부탁드립니다.
※ 이 글은 우리 시대의 교회를 걱정하며 더 나은 길을 모색하고자 노력하시는 진실된 교역자 분들께 드리는 글입니다. 바빙크의 교회론 쯤이야 하시는 분들은 걍 넘어가시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 싶으신 분들께서는 일독해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바빙크의 교회론은 그의 교의학 4권에 총 3개의 챕터로 전개된다. 각 챕터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54장 교회의 본질, 55장 교회의 통치, 56장 교회의 권세. 본질, 통치, 권세. 바빙크는 왜 이 세 가지 워딩으로 교회론을 풀어갔을까. 대체로, 그래도 비교적 좀 상태가 괜찮은 교회에서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교육은 더러들 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벨기에(벨직) 신앙고백서에서 언급하는 "참된 교회의 표지(말씀, 성례, 권징)"에 대한 순차적 설명이 그것이다. 이 부분은 정말 중요한데, 보통 복음주의권에서 교회에 대해 다룰 때, 대체로 교회를 의미하는 다양한 용어들에 대한 뜻풀이로 출발해서 그 다양성과 풍성함을 설명하는 방식을 쓰곤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치명적인 단점은, 자의적인 해석의 범주를 한없이 넓혀버리고(그래서 객관성을 잃고 오류의 가능성이 커짐), 관점이 자꾸만 애초에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의 본의에서 벗어나, 사람의 필요나 만족감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바빙크는 교의학에서 그리스도의 중보와 그 중보로 인해 발생하는 유익들을 설명하는 문맥에서, 그 유익의 수용자로서의 택자, 곧 교회를 등장시키며 그의 교회론을 시작한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 먼저 나온다.......
(실제로 이 부분은 참된 교회의 표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이 부분은 많이들 알고 있고 책에서도 다룬 경우가 많으니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어서 55장이다. 앞에서 교회가 어떤 곳이며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면, 이곳에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교회의 통치에 대해 다룬다. 497단락에서 바빙크는 교회에 대해 논할 때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이해해야 함을 말하려고 교회에 대해서 아래의 두 가지 성격이 공존함을 소개한다. (표현은 필자가 약간씩 수정했음)
- 1. 믿음과 삶의 교제 가운데 유기체로서
- 2. 직분과 은혜의 방편들 가운데 제도적 기관으로서
그러니까 우리는 흔히 1번에만 집중하기 쉽지만 사실 2번이 함께 중요하고 또 소홀히 여김받은만큼 더더욱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꺼낸 셈이다. 교회에 통치는 필수적이다. 하나님이 시민의 영역에서 주권을 정부에 주었던 것처럼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웠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그의 왕국에 불러 모으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다. 신자가 수단의 매개 없이 거듭나서 모이는 게 아니다.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바빙크는 그 이유가 교회가 자유롭게 독자적으로 제도를 조직하고 스스로 통치권을 지닌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교회를 설립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심지어 '제도' 없이 교회가 된다는 생각은 신비주의라고까지 표현한다.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다.
바빙크는 비가시적 교회가 가시적 교회 안에 모이고 형성되며, 거주하고 보존되는데, 양쪽 교회 모두에서도 통치가 없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498단락에서 바빙크는 앞의 주장에 대한 역사적 배경 설명으로 근거를 밝힌다. 구약 시대에 가장은 제사장으로서 자기 자녀들에게 약속을 전달했고, 하나님께 경배와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신약에 와서는 유대 그리스도인 교회만이 아니라 신약교회 전체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기초하고 그들의 말을 통해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다. 이어서 열두 사도 임명으로 사도직이 수립됨은, 특히 그리스도가 지상의 자기 교회에 주었던 제도적 성격에 대한 강력한 증거라고 밝힌다. 이는 명백하게 예수께서 불러 세우신 것이다. 이렇게 사도들이 세워짐은 그 처음에 부르신 것에서부터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그리스도의 특별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나타난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에 대한 것인데 그들은 사도를 도와 교육과 건덕을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그 후 항존 직분이 등장한다. 처음엔 특별한 직분의 구별이 없이 성경을 가르쳤겠는데, 교회가 확장되면서 말씀과 성례의 필요가 증가했고, 이를 충족시키고 제공할 지역적이고 항구적인 직분이 필요해졌다고 설명한다. 제한 없는 자유는 온갖 악용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구약부터 신약의 교회를 통시적으로 보면서 교회의 통치를 위한 직분의 수립을 소개한다.
499단락에서 바빙크는 그러한 직분자들이 활동하는 현장으로서의 지역단위 교회에 대해 설명한다. 초기에 교회는 한 건물에 회집할 수 없었기에 그룹별로 개인의 집에서 회집했다고 한다. 덕분에 통일성과 항상성을 유지할 항존직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되었다는 말인 듯하다(필자의 해석). 직분은 "교회들"의 협력을 통해 생겨난 것이다. 교회는 장로와 집사 등의 직분자를 두는 조직을 절박하게 필요로 했고, 사도들의 지도 아래(제비뽑기, 선출 등) 발생했다고 말한다. 이어서 각 직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이 부분도 많이들 다루고 책도 있고 특종이에서도 다루고 그랬으므로, 도표만 제시하고 생략한다.
[도표]
장로
다스리는 장로 / 가르치는 장로의 분화
모든 감독들은 장로들이지만 모든 장로들이 감독들인 것은 아니다.
장로의 직분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감독과 다스림과 인도의 과제를 담당
교회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자들에 대한 요구 증가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이 죽고 특별한 은사들은 그쳤고 온갖 오류와 이단이 교회 안팎에 등장
가르치는 능력은 교육과 훈계 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을 책망하는 것
이 직분을 수행하는 데 훈련, 준비, 학업이 필요 - 바울은 디모데를 교육하고, 신실한 자들에게 전수할 것을 명함
말씀의 사역자는 자신의 삯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이 기독교회 전반의 합의
집사
가난한 자들의 구제를 위한 직분
식탁 봉사에서 비롯하여, 사용하고 남은 것이 분배되도록 함
아마도 많은 회중이 일곱 집회소에서 모였고 각 집회소마다 한 명씩의 집사가 필요했던 듯
사도들이 집사들의 수효와 자격 조건을 제시했을지라도, 이 사람들을 선택하는 권한과 재량은 교회에
장로의 경우 가르치는 능력이 강조되었다면 집사에게는 깨끗한 양심이 요구됨
집사와 장로직은 긴밀한 연관성
이어서 단락 500번에 이르러 바빙크는 이러한 귀족적 장로적 조직이 곧 군주적 감독적 교회조직으로 바뀌었음을 지적한다. 2세기 후반부터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시작된다. 가르치는 교회로서의 주교 / 다만 듣고 순종해야 하는 듣는 교회로서의 평신도 이런 구도로 나뉘는 것이다.
501 단락에서 로마교회가 이러한 체제를 교황체제로 발전시킨 역사를 설명한다. 국제적 도시의 교회는 기독 세계 교회의 중심점이었고, 로마교회의 수위성은 오랜 세월동안 점차 강화되어 간다. 안타까운 역사다.
502 단락에서 이러한 계급적 통치 형태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에 주었던 것과 정면으로 모순됨을 바빙크는 밝힌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고 1세기 교회의 구조와도 모순된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계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베드로의 수위성도 근거가 없다.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짐은 은유적 표현일 뿐, 기초석은 '모든 사도들 위'이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들도 동일한 고백을 통해 교회의 토대를 놓았다. 열쇠권은 모든 사도에게 부여된다.
바빙크는 503 단락에 이르러 로마교회가 그렇게 오해한 교회의 통치권에 대해, 본래 교회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설명하면서 소위 말하는 두 왕국 이론을 소개한다. (직접적으로 두 왕국 이론을 이 단락에서 아직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에도 왕들과 더불어 제사장들이 존재했고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 관계로부터 분되었으며, 신약에는 오순절 날에 성령 안에서 국가와 사회에 대해 자신에게 고유한 성격과 독자적 존재를 부여한 독립적인 삶의 원리를 받았던 존재가 바로 교회였다. 교회는 그 기원과 본질에 있어서 하나의 기적, 열매다.
자고로, 본질과 형태, 비가시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분리되어 무관하게 병립하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말씀과 성례가 순수하게 집행되기 위하여, 교리와 삶이 이에 상응하여 조정되기 위하여, 선한 통치가 필요하다. 고백이 주요한 것이지만 교회법은 이 고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불순한 고백이 통치를 부패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한 통치가 고백을 타락시킨다. 설령 기독교 국가라 하더라도, 즉, 로마가 제국교회를 만들었던 것처럼, 기독교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의 협력이 증진된다 하더라도, 교회와 국가의 사명은 본질적으로 여전히 구별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은혜의 왕권인데, 세상 군주의 왕권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이 원리는 거의 모든 고백서에 담겨있으며, 16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서 모든 인간적 권세에 맞서 싸우고 교회의 자유와 독립성을 회복하고 보존하는 추진력이었다.
504 단락에서 바빙크는 신약의 교회가 이런 자유와 독립성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그 흔적을 추적한다. 사도들은 미리 자신들의 권위로 직분자들을 세우지 않고 먼저 교회들을 설립하고 그 뒤에 교회들 스스로 직분자를 선택하게 했다. 신자들은 또한 다음과 같은 의무들을 지닌다. 교회에 가입할 의무 :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활용하고 형제를 동정하고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며 신자들의 회집에 참석하고 주의 죽으심을 전파하며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고 나누는 자비의 활동을 할 의무. 자신의 방식과 정도에 따라 교회를 형성할 의무(교회 개척과 직분자 선출의 가능성), 그렇게 세워진 교회를 개혁할 의무(분명하게 거짓 교회로 드러난다면 신자들은 이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다시금 주의 말씀을 따라 교회적으로 살아야 할 거룩한 직무와 의무를 갖는다.)등이 뒤따른다.
505 단락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권세는 반드시 지배하는 권세가 아니라 섬기는 권세여야 함을 보인다. 제도로서의 교회의 목적은 택자들을 모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며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나 직분, 말씀, 성례 없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봉사를 통해 택자를 모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었다. 그래서 바빙크는 심지어, "교회는 택자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직분은 그것을 위해 가설적으로 필요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 단락에서는 마치 부록처럼 직분자가 되는 단계를 소개하는데 거기에는 "소명, 검증, 임명"이라는 단계가 있음을 소개한다. 사실 필자는 특종이에서 이 부분을 "은사 - 소명 - 선출 - 안수"라는 단계로 세분화하여 소개한 바 있는데, 필자의 방식이 더 현대적으로 적용하기 알맞다고 본다. ^^;; 소명은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의 조화를 말한다. 외적 소명은 시험, 조사 또는 검토로 이어지는데 이는 안전을 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역시 조사를 시행할 권리는 교회이다.(신학교가 아님) 이는 바로 이것이 교회의 통치와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506 단락에 오면 이러한 교회의 권세가 안타깝게도 타락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로마 교회에서 주교는 대제사장이 되었고 장로들은 제사장이 되었고, 집사들은 미사를 거행하는 일에 주교를 돕는 레위인들이 되었다고 바빙크는 뼈를 때린다. 그러나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뒤이어 개혁 작업을 시작하셨다. 바빙크는 직분의 개혁이 장로교회적인 형태가 된 것의 시작은 칼빈 덕분이라고 말한다. 장로의 교회 통치는 말씀으로부터 유래하고 성경의 권위로 교회 안에 도입되는데, 개혁파는 말씀 봉사자 직분의 회복과 나란히 장로직과 집사직의 회복을 통해 성경의 사상을 가장 순수하게 붙들었고 교회의 권리를 가장 확고하게 인정했다는 평가를 바빙크는 하고 있다.
여기까지 해서 55장 교회의 통치에 대한 설명이 마친다. 직분의 회복에 대하여 바빙크가 사용한 멋들어지고 인상적인 표현을 소개하며 이 장을 끝낸다.
"그리스도는 교사의 직분을 통해 교육하고 장로의 직분을 통해 지도하며 집사의 직분을 통해 자신의 양떼를 돌본다."
"그리고 그는 세 가지 직분 모두를 통해 우리의 최고 선지자와 우리의 영원한 왕과 우리의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신다."
---- 55장 끝! 56장 시작! ------------------------- 힘내세요 ----
56장 교회의 권세
바빙크는 54장과 55장을 통해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통치"에 대해 쭉 설명하고도, 특이하게 "교회의 권세"에 대해 아직도 꽤 많은 분량을 남겨주었다. 56장 전체는 교회의 권세에 대한 이야기다. 왜 교회의 권세가 왜 언급되나? 507단락은 그 질문으로 시작한다. 바빙크는 인류 보존을 위해 교회와 국가라는 제도를 필요로 하게 한 것은 '죄'였다고 지적한다. 이 죄로 인해, 교회와 국가 두 권력이 충돌할 가능성이 '저절로'(자연스럽게) 생겨났다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교회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느냐의 실천적인 문제랄까. 그러면서 다시 바빙크 특유의, 성경 역사 전체를 훑어가는 서술이 이어진다. 이미 구약의 교회에서부터 그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교회와 국가가 하나였다고 보는 것은 잘못인데, 이 둘은 법률, 제도, 공무원, 직분자, 심지어 부분적으로 회원에 있어서도 선명하게 서로 구별되었다고 말한다. 부정한 자들과 나병환자들은 비록 일시적으로 분리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시민이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억압하라고 백성들에게 촉구하지 않았고, 단지 회개할 것을 권고했다. 이스라엘이 더욱더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했을 때에도, 종교적 공동체는 존속될 수 있었다. 이런 근거들로 구약을 마치고 신약으로 넘어간다.
508단락은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가 도입한 훨씬 더 자유롭고 독립적인 새로운 삶의 조직이었음을 밝혀주는 부분이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에 준 권세는 열쇠권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관된 봉사, 섬김의 성격이며, 그분의 말씀과 성령에 매여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 성격은 영적이고 도덕적이다. 말씀과 성례를 섬기고 시행하며, 하늘에서 무엇이 적용될지 결정하고,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고, 교회의 회원들에 대해 권징을 시행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형제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며 권고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 바로 천국의 열쇠권이다. 즉,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정부, 대제사장, 산헤드린, 헤롯, 빌라도 등의 권세도 인정한다. 그리스도는 세금을 내고, 상속에 대한 두 형제 사이에 재판장 되기를 거부하고 가이사에게 가이사의 것을 바치라고 명하시며 하늘에서 불을 내려 심판하기 바라는 요한과,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를 책망하고 자신의 이름과 일을 위해 자기 제자들이 칼로 싸우는 것을 금하셨다. 이것이 신약의 교회에 주어진 교회의 권세였다.
그런데 문제는 또다시 중세 시절의 교회가 이러한 교회의 권세를 전혀 다르게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도 좀 식상하므로 509-510 단락으로 이어진 중세 교회 시절에 대한 서술은 여기서는 생략한다. (책을 직접 읽자!)
511단락에 와서 종교개혁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이러한 교회권력의 부패에 저항한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다. 교회의 권세는 루터가 불태운 '교회법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데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루터파와 개혁파의 차이를 논하는데, 짧게 요약하면 루터파는 로마교회로부터 소수에 대한 말씀의 직분적 봉사를 전수받아 사적인 고해제도를 유지했고, 시민적 법정과 교회적 법정이 혼합된 법정이라고 한다. 반면에 츠빙글리, 에라스투스, 항변파, 합리주의자들은, 많은 현대신학자들의 가르침과 동일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즉, 교회가 권징권을 기독교 정부에 양도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자연적 영역과 따로 분리된 종교적 윤리적 영역으로 제한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개혁파는 말씀의 직분적 봉사와 죄사함의 선포, 즉 사죄가, 신자들의 공개적인 모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겼다고 설명한다. 개혁파에게 있어서 권징은 교회의 원동력이다. 이 문제로 칼빈은 제네바에서 20년간 투쟁했다. 때때로 추방을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적용하여 그 영적 성격을 상실한 재세례파와 메노파와 구별된다. 온 세상이 비록 악한 자의 손 아래 있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 거룩하고 선하며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고백했다. 이러한 개혁파에 대한 바빙크의 평가는, 특종이에서 언급했던 "보이지 않는 교회가 종교개혁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해석과 비슷한 원리라고 본다. 교회가 가정과 사회, 예술과 학문을 포함한 자연적인 삶 전체의 구원을 위해 영적 소유를 나눠주듯이, 기독교 국가 정부 역시 참교회를 보호하고 참교회의 확대와 확장을 지원하고, 모든 우상숭배와 거짓 종교를 저지하고 근절시키며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멸망시키기 위한 엄숙한 소명을 지닌다. 이것이 개혁파가 지향하는 교회의 권세이다. 다만 17세기 이후, 이신론자들이 등장한 뒤, 관용과 온건함이 18세기의 유행어가 되면서 개인주의가 부흥하고,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 등의 사상에 기초하여 그 결과로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뒤따르게 된다.
512단락에서 바빙크는 본격적으로 교회의 권세를 설명한다. 교회의 권세는 구원을 위한 것이며, 파괴가 아니라 세우기 위함이며, 신자들의 온전함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다. 이 부분을 흑곰북스에서 번역중인 길레스피의 책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비교하며 정리해보면, 주요 내용이 아래와 같다.
교회의 권세는
기원, 시행기관, 속성, 본성, 목적, 수단 등에서 다르다.
교회의 권세를 정부에 이양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듯이, 교회의 권세를 정치적 권세로 바꾸는 것은 죄악이다.
로마교주의와 재세례주의 모두 이 잘못을 범했다.
로마교회가 두 개의 칼이라는 이론을 따라 온 세상에 대한 교황의 직간접적 권세를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세속적) 욕망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권세를 성경적/영적 권세로 이해했다.
[도표]
- 교도권 - 말씀과 성례의 봉사(목양)
- 재치권 또는 통치권(권징도 포함) - 영적 특성을 지닌 재판권도 여기서 유추 가능 (현행 당회와 노회 총회의 재판국)
- 자비의 권세 또는 자비의 봉사(집사회)
표어: 가르침은 교사에게 다스림은 장로에게 자비의 봉사는 집사에게!
(바빙크는 이후 513~516장에 걸쳐 이 세 성격을 상술하고, 517에서 적용한다. 이 부분은 간단하게 내용을 정리하고 도표로 제시하겠다.)
513단락: 교도권
교도권은 세 가지 교회의 권리와 의무를 포함
1. 미래의 교회 봉사자들 훈련/감독/콜링/심사/파송/임직/후원
2. 직분의 수단을 통해 각각의 필요를 따라 다양한 형태로 말씀을 전함(어린아이들에게는 젖의 형태로, 성인들에게는 딱딱한 음식의 형태로)
3. 각 백성과 나라, 각 세대와 시기에 따라 모든 교회와 모든 신자들의 필요에 따라 전개시키고 적용 말씀을 보존하고 번역하며, 믿음의 규칙을 따라 해설하고, 거짓 공격을 변호하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토대 위에 교회를 건설하며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교회를 모든 사람의 눈에 드러내고 알리기
514단락: 통치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응! 신자는 누구나 서로를 지켜야 해) 모든 신자는 서로의 지체로서 함께 고난받고 함께 즐거워하며, 서로를 가르치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덕을 세우는 관계이다. 그러나 양떼 중 그 어떤 한 마리도 돌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목양의 사명을 특정 직분에 맡겼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왕으로서 장로직 가운데 교회를 다스리기 위한 특정한 직분을 제정한다. 이 다스림은 영적 성격을 지닌다. 이 목양에 대해서, 중세에 이 직분의 봉사가 고해성사로 대체되었으나(성직주의, 편의주의) 종교개혁은 이를 다시 장로직으로 회복시킨다.
515단락: 통치권 2 (특별히 권징)
구약의 초기에는 죄에 대한 속죄 또는 진멸이 있었다. 진멸은 동시에 시민적 형벌이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이 하나의 공동체가 된 뒤로는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교회의 형벌 등장한다. 그 원리는 이러하다. 개인적 책망 >> 두 세 증인 앞 >> 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책망 순으로 확장. 목적은 그 형제를 얻는 것이지 누굴 제거하거나 배제함이 아니다.
종교개혁에 이르러 성경적 가르침은 개혁교회의 권징에서 가장 순수하게 시행된다.
[도표]권징의 몇 가지 원리들 (생략)
516단락: 자비권
이것은 중보기도와 복을 비는 것이다.
분야는 크게 나누어주는 것과 부자의 탐욕을 경고하여 (그를 타락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으로 나뉜다. 후자는 보통 언급하지 않는데, 중요한 권세 중 하나다. 가난한 자, 병자, 낯선자, 갇힌자, 지적능력이 부족한자, 정신병자, 과부, 고아 등 교회안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모든 비참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에게 도움을 펼치고 말씀과 행동으로 돕는 것이 자비권의 핵심이다.
517단락에서 바빙크는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권세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설명한다. 본래 지역 교회의 당회가 있었다. 그리고 지역 교회들의 통일체로서의 장로회가 구성된다. 영적으로 하나된 이 교회들이 필요한 경우 보편적 관심사를 서로 의논함은 매우 자연스럽다. 처음엔 장로들, 집사들, 그리고 보통 교인들도 있었다. 그런데 중세에 와서 성직 계급사상이 발전되면서 이런 권세를 다루는 모임은 점차 주교들에 의해서만 개최되게 된다. 거기에는 서열이 생긴다. 심지어 4~10세기에 교회 회의는 교회의 직분자가 아닌, '황제'에 의해 소집된다. (이후 타락상은 자주 듣는 내용이므로 생략) 이후 종교개혁의 시기에 이르러 이 부분이 노회를 통해 개혁되는데, 개신교 최초의 노회 정치는 아마도 프랑스에서 처음 발전된다. 1559년 파리 첫 노회가 소집되고, 신앙고백서와 교회법이 채택되어 교회의 연합이 시도된다. 그러나 즉각 반대에 부딪히는데, 주요 세 부류는 에라스투스, 항변파, 독립파였다.
[도표] 역사 속에 등장한 이와 같은 교회회의에 관한 몇 가지 원리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영적 연계성 - 토론으로 문제를 해결/판결
- 성직 계급을 전복시킴
- 평화로운 방법으로, 신중한 조사와충분한 논의를 통해 결정하는 수단
- 교회의 위임장에 매여있으며, 정부나 교황이 아니라 교회 자체에 의해 소집, 적격자에 의해 수행, 정부의 간섭 없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판단 결정
- 더 높은이 아니라 더 넓은 지역에 적용되는 더 많은 권세
- 교회 자체의 권위 - 말씀에 복종 - 지배하고 강압적인 권세가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는 권세
518단락에서 바빙크는 결론적으로 개혁파 입장을 정리해준다. 로마교의 입장으로는 온 세상이 반드시 교회적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육체적 징벌과 시민적 형벌을 통해 순종을 강요한다. 종교개혁은 여기서 우리를 해방시켰다. 정부와 모든 사람에 대한 강요와 징벌의 권한은 교회로부터 제거하고 기독교는 순수한 영적 권세로 회복되고 존중되었다. 그러나 같은 종교개혁자들 사이에도 차이점들이 있다. 그래서 바빙크는 이렇게 표현한다.
"회피가 재세례파의 주장이고 금욕이 로마교회의 표어라면, 갱신과 성화는 개혁파의 슬로건이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근본 이유를 바빙크는 개혁파가 창조와 재창조 모두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타락 후 창조세계는 실체적으로 질료적으로 타락 전과 동일한데, 따라서 창조 세계는 여전히 하나님의 작품으로 존재하고 그와 같은 것으로서 존중되고 칭송되어야 한다는 것. 개혁파에 있어서 창조된 것은 재창조 가운데 통합되어 회복되는 것이고, 그 영향은 가정, 사회, 국가, 직업, 사업, 예술, 학문 등에 미친다. 기독교의 진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영역에 도입되어, 가정과 가족의 명예가 회복되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여겨지고 과학과 예술이 기독교화되며, 도덕적 삶의 수준이 높아지고, 사회와 국가가 개혁되고, 법률과 제도적 기관들, 도덕과 관습이 기독교적 특성을 띄게 된다. 바빙크의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 세계관의 올바른 지위를 자리매김해주는 원리가 아닐까 싶다.
이어서, (근대 이후) 정부의 임무가 제한되고, 나라들이 자유롭고 성숙해지며, 교회들은 갈수록 더욱 분리되고, 사고와 생활의 온갖 경향들이 등장한다. 지속적으로 (세상)범죄와 종교적 죄 사이의 차이점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바빙크 시대에도 이미 관찰되는 거대한 흐름이었던 거 같다. 그러나 세상이 변해도 어쨌거나 놓칠 수 없는 핵심은, "교회는 예술, 학문, 가정, 사회, 국가 등 모든 피조물이 주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는 요구를 저버릴 수 없으며, 이 요구는 설교와 도덕적 증거일 뿐, 결코 강요나 형벌을 통해 사람들에게 강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설령, 기독교 정부라도 그러하다. 바빙크는 이렇게 단호하게 설명하되, 마지막에 "누구도 여기에 확고한 경계선을 그을 수 없는데, 이는 민족과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라고 여유를 둔다.
긴 내용을 정리하겠다. 바빙크의 시야는 20세기 초까지였다. 그러나 이후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교회론의 박약함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우리가 교회사를 다루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망하고 또한 시대를 관통하는 복음을 시대에 맞는 옷으로 전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에 앞서 올바른 교회론에 기초하여 통찰을 얻으며 비로소 그 어떤 시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글에 사용된 9할 이상의 문장은 특별히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바빙크의 교의학에 담긴 문장을 그대로 혹은 변형해서 사용했음을 밝힌다. 따라서 이 글은 부분적으로 인용될 수 없으며, 황희상의 순수한 저작물도 아니고 단지 개인 공부와 나눔을 위한 요약 정리문이니, 스크랩을 원하신다면 본 블로그의 URL을 이용해주실 것을 강조드린다. (부분적으로 퍼가지 마세요~) 아울러 본 글의 목적은 필자가 무슨 주장을 펼치려 함이 아니요, 독자가 바빙크의 교회론에 대하여 흐름을 잡고 모티브를 얻은 뒤에 실제로는 바빙크의 교의학 해당 파트를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하기 위함이다.
- 2020.6.11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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