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은 은혜의 수단 세 번째, 기도에 대해 다루기 시작합니다. 교리문답은 세례와 성찬에 대해서도 아주 많은 분량을 다루었지만, 기도에 대해서도 아주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는 평범하고 쉬운 것이 아닌가요? 누구나 다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배워야 할 내용이 많을까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첫날’부터, 어쩌면 ‘첫 순간’부터 기도를 해왔습니다. 그저 눈을 감고 생각만 해도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너무도 익숙합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장점도 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 무비판적이 됩니다. 옳은지 그른지 따져볼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늘 하던 대로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압니다. 지금까지 대교리문답은 단 한 번도 그런 ‘직무유기’를 그냥 두고 본 적이 없습니다. 신앙의 요소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신자로서의 직무유기입니다. 대교리문답은 집요합니다.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콕 집어 문제를 제기합니다. “네가 알고 있던 것이 정말 아는 것이냐”를 되묻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대교리문답을 통해 기도에 대해 세밀하게 공부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교리문답 178문부터 196문까지의 나머지 모든 문답은 사실 모두가 기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물론 185문 이후로는 주기도문을 해설하고 있지만, 그 역시 결국 기도입니다. 대교리문답은 주기도문을 “은혜의 방편 세 가지” 중에서 마지막 항목인 ‘기도’의 맥락에서 설명합니다.
맨 먼저 기도의 정의(definition)부터 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왜 정의가 중요하지요? 벌써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했지만,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강조합니다. 교리문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어에 대한 정의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통성기도가 옳은가요? 잘못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기도를 화끈하게 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참 좋아요. 하지만 때로는 너무 시끄럽고 간혹 광신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통성기도, 괜찮은 건가요?”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대답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판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요? 네. ‘정의’, ‘개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는 A이고 성례는 B인데, 기도를 B처럼 하면 그것은 틀린 것이 됩니다. 기도는 A처럼 해야죠. 이렇게, 어떤 개념과 기준 없이 - 정의나 규칙과는 상관없이 - 보기에 좋거나 다수가 옳다고 하니까 옳은가보다 하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만큼 정의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판단에 앞서, 먼저 기준을 잡고 그 기준에 따라 대답해야 합니다. 기도의 원래 목적이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라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하여 기도를 그렇게 하는 것은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목적이 분명하다면 방법은 다양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양한 방법 중에서도 원래의 목적에 좀 더 이바지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르는 고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대교리문답 178문은 기도의 정의를 묻고 대답하는데, 구조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영문으로 보면 답변의 구조가 더 잘 보입니다. 굵게 강조한 전치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세요.
A. Prayer is an offering up of our desires
unto God,
in the name of Christ,
by the help of his Spirit;
with confession of our sins,
and thankful acknowledgment
of his mercies.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 성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뢰는(offering up) 거랍니다. 우리말엔 전치사가 없어서 번역하면서 이렇게 “~으로”라고밖에 번역할 수 없지만, 전치사의 용법을 아는 분은 금방 감을 잡으실 겁니다. 이런 경험, 대교리문답을 공부하면서 여러 번 겪으셨을 겁니다.
게다가 이 전치사들은 각각 다음에 이어지는 문답들의 “개요” 역할을 합니다. unto God 부분은 179문 “우리는 하나님께만 기도합니까?”로 연결되며, in the name of Christ 부분은 180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로 연결되고, by the help of his Spirit 부분은 182문 “성령께서는 어떻게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까?”로 연결됩니다.
Q. 179. Are we to pray unto God only?
기도에 대한 첫 부연 설명에서, 기도의 대상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unto God. 우리는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합니다. 이에 반대되는 사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에게 혹은 사도들에게도 기도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 등을 통해, 사제가 성도의 기도를 ‘대신’ 아뢰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건 또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 두려움을 “배려” 한답시고 하는 것이나, 진리를 가리는 짓입니다. 의도는 좋으나 그 의도 속에 늘 죄악이 판치게 됩니다. 인간이 제 생각대로,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올바른 대상에게 기도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네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아빠에게 다 말하렴.” 그랬더니 옆집 아저씨에게 가서 부탁하면서 “아이고 아저씨, 저는 아저씨만 믿습니다. 아저씨가 우리 아부지께 말씀 좀 잘 드려주세유~” 이러고 있으면 참 답답하겠지요? 명확한 대상자에게 기도하는 것은 그분께 드려야 할 당연한 의무입니다. 특히 답변 중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able to fulfill the desires of all(모든 요구를 채워주실 수 있는)” 우리 아버지는 바로 그렇게 능력이 충만한 분이십니다. 뭐든지 다 채워주실 수 있답니다. 그래서 그분께 기도드리는 것이죠!
Q. 180. What is it to pray in the name of Christ?
두 번째 부연설명인 in the name of Christ 에 대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끝낼 때 늘 하는 소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추상적인 말이 무얼 뜻하는지를 설명하면서 “긍휼을 구한다”고 했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세, 혹은 방법으로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본문은 in obedience(순종하면서)와 in confidence(신뢰하면서)라는 두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기도할 때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함으로써 하라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문답은 거기서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아라!”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동시에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우리에게 지극히 큰 유익이 주어지고 있음을 매우 진솔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by drawing our encouragement”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그저 무의미하고 공허한, 단순한 구호나 외침이 아니라, 용기와 담대함과 힘과 소망을 그리스도와 그의 중보로부터 실제로 ‘끌어당겨내는’ 것이랍니다.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곧 그리스도와 그의 중보로부터 우리에게 풍성한 유익(용기, 힘, 소망)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 덕택에 기도하는 것이고, 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풍성한 은혜에 주목하고 감사할 때, 보다 큰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지존하시며 영광의 빛이 우주의 모든 빛보다 밝은 엄위로우신 하나님 앞에 어찌 감히 나의 비천한 모습을 가지고 나아가서 무엇인들 구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 그런데도 그게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꽤 존재했나 봅니다. 181문에서 굳이 또 한 번 부연해주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Q. 181. Why are we to pray in the name of Christ?
왜냐고 묻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비천하여, 중보자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기에? 더 자세히 봅시다. 그리스도는 그 중보의 사역에 정식으로 임명 받았(appointed to)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실질적으로 그 사역에 적합하신(fit for) 분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저 앞에서(대교리문답 1부) 배웠는데, 여기서 다시 반복해주고 있습니다. 기도의 말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말하는 바로 그 때, 언제나 구속의 은혜와 우리 존재 자체까지도, 그리스도의 중보와 떼어놓고는 단 1그램도 생각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을(대요리문답 55문) 여러분도 다시금 뼈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중보 없이는, 나란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헛것입니다.
Q. 182. How doth the Spirit help us to pray?
성령께서 기도를 도우시는데 ① 하나는 우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② 다른 하나 는 우리 마음에 이러이러한 것을 소생시킴으로써 하신다고 합니다. 무엇을 깨닫게 하시고 무엇을 소생시키신다는 걸까요?
이어지는 183~185문은 우리가 기도할 때 ‘누구를 위하여(for whom)’, ‘무엇을(for what)’, ‘어떻게(for how)’ 기도할지를 묻고 답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해설이 불필요합니다. 그냥 본문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본문만 읽어도 “이런 게 기도였구나!” 하는 놀라운 은혜로 감격하게 될 겁니다. 아울러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엉뚱한 기도를 많이도 했는지를 또한 깨닫고 반성하게 될 겁니다. 내용이 정말 자세합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 때 알아야 할 중요한 정보들을 일일이 설명합니다.
왜 이렇게 설명이 자세할까요? 교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대교리문답 1부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이 주로 “계시”에 의해 주께서 우리가 알고 깨닫도록 하신 지혜라면, 2부에서 설명하는 “하나님께서 요구 하시는 내용”에 대한 부분은, 그 지혜가 우리 머리로 깨닫고, 가슴의 동의를 받아, 팔다리로 실질적인 행동의 동기와 근거로 작용하여 움직이기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이제는 우리가 행할 부분에 대해 묻고 답하고 있으므로, 명확한 행동의 목표를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답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왜(누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에 대한 모든 답을 얻게 될 것이며, 그렇게 깨달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동의하여, 기꺼이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잘하고 못하고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라는 점입니다. 은혜의 방편으로 이런 저런 수단들을 주시지만, 그것을 알게 하고, 동의하게 하며, 감사하게 하고, 행하게 하시는 등 필요한 모든 과정은 역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은혜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 은혜를 받는 수단까지도 예비하셔서 사용하게 하십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 사랑. 절대적 사랑입니다. 내 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이는 것 같을 때라도 내가 아주 엎드려지지 않을 이유는, 실로 성령께서 내 연약함을 도우시는 덕택입니다!
독자 여러분, 아직 많이 부족하다 싶더라도,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이 가르치는 기도대로 오늘 한 번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정말로 “은혜의 방편”이로구나 하고, 독자 여러분도 머리와 가슴으로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글: 황희상 / ‘특강 소요리문답’, ‘특강 종교개혁사’,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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