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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그러나 실제로 십계명을 지키며 성도답게(또는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십계명을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해석 원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필자가 모 신학대학원에서 교리교육 방법론 과목을 강의할 때, 꽤 많은 시간을 할당하여 바로 이 십계명을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학생들이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운영했습니다. <특강 소요리문답 하권>의 십계명 설명 부분으로 조별 나눔을 통해 대교리문답이 얼마나 자세히 ‘압축파일’인 십계명을 폭넓게 ‘확장’해주는지를 체험하게 합니다. 많은 신학생들이 실습을 마치고 나서 깜짝 놀라며 고백합니다. ‘십계명에 대해 새로운 눈을 떴다’고 말입니다. 신대원을 다니고 있는 지금에서야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십계명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은 십계명 해석원리를 별도의 문답을 따로 마련하여 자세히 소개합니다.

“99문. 십계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질문에 ‘규칙’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왜 규칙이 필요할까요? 지난 글에서 밝혔다시피 율법이 ‘압축파일’이라서 그렇습니다. 딱 보고 ‘직독직해’ 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한 겁니다. 압축파일을 제대로 풀어야 담긴 내용을 끄집어내서 이해도 하고 적용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적용하는 것은 곤란할뿐더러, 사실 우리 삶에 거의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일입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총 8개의 항목에 걸쳐 십계명 해석 원리를 소개합니다.
하나씩 살펴보며 해설하겠습니다.
  
① 율법은 완전한 것으로, 각 사람이 의에 이르고, 전적인 복종에 이르도록 영원토록 전인격을 다하여 온전히 순종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의무를 완전히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모든 죄의 지극히 적은 부분이라도 범하지 않도록 금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이 완전한데, 그 완전한 율법이 순종을 요구한다는 겁니다. 율법이 완전한만큼 순종도 완전해야 한다는 거죠. 완전한 순종이란, 말로만 따르거나 정신만 따르거나 몸만 따르거나 굵은 것만 따르거나 잠시만 따르는 게 아니라 ‘생.말.행.뜻.’ 즉 생각과 말과 행동과 뜻 모든 면에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영원히 따르는 순종을 말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법과는 아주 다른 것이라서, 애초에 인간으로서는 지킬 수 없는 차원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합니다. 첫 줄부터 숨이 턱 막힙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닙니다. 두 번째를 봅시다. 
  
② 율법은 영적인 것으로, 영혼의 이해, 의지, 정서 그리고 다른 모든 능력에 미치며, 그뿐 아니라 말과 행동, 그리고 동작에까지도 미칩니다. 
  
율법이 미치는 범주가 그야말로 인간의 ‘모든’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어디 조금이라도 피해갈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원리를 오해했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율법을 하나씩 지켜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다 지킬 수도 있으리라 믿었고(정말??)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노력은 꽤 성공적이기도 해서, 당대의 다른 신자들보다 외형상 더 경건했고, 칭찬과 존경도 받았습니다. 하긴, 아예 노력하지 않는 것보다는 노력하는 편이 어쨌거나 더 나은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방향을 잘못 잡았는데, 바로 내적이며 영적인 준수를 간과했던 것입니다. 외형만 추구하는 것은 율법 준수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전 영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거꾸로 해석해서, ‘마음만 순수하다면 겉으로 보이는 행위는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 되겠습니다.
  
③ 여러 가지 점에서 하나이거나 똑같은 것이 몇몇의 계명에서 요구하거나 금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오해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는 각 계명이 하나 혹은 한두가지만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순 치환은 십계명 해석을 어렵게, 혹은 너무 단순하고 건조하게 만듭니다. 이를테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6계명이지만, 살인은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므로 도적질하지 말라는 8계명 위반도 됩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의 확장을 하지 못한다면 문제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볼까요? ‘열심히 일하라’는 명령은 몇 번째 계명과 관련될까요? 제4계명을 보면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4계명과’만’ 관련될까요? 그렇게만 본다면 제8계명에서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고 네 양식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는 명령이 또 나오는 것을 보고 당황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제10계명에서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과도 연결됩니다. 남의 것을 탐내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자기 열매를 얻어야 합니다. 즉, 계명마다 조금씩 관점을 달리하면서 동일한 명령이 여러 곳에 관련될 수 있다는 겁니다. 

혼란스러운가요? 그렇더라도 어쩌겠습니까. 계명간의 중첩된 확장과 적용이 우리 보기에 혼란스럽다고 해서 그게 ‘틀려먹은’ 것이 아닙니다. 해석 능력이 딸리는 우리가 문제일 뿐, 원래 십계명은 상호 모순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잘못이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항상 우리 탓. 사용자 과실. 율법 탓 아닙니다.
  
④ 의무를 명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죄가 금하여졌고, 죄를 금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의무가 요구됩니다. 이와같이, 어떤 약속이 부가되고 있으면, 그와 반대되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고, 어떤 경고가 부가되고 있으면, 그와 반대되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뭐가 좀 복잡한데, 쉽게 말해서 십계명에는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어느 한 쪽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둘 다를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부정적 표현이 더 많지만(~하지 말라),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소위 ‘네거티브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십니다. 예를 들어 ‘못 지키면 벌을 준다’는 말은 그 반대로 ‘잘 지키면 상을 준다’는 긍정의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⑤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결코 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모든 특정한 의무를 어느 때에나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목적이 선하면 가끔은 율법을 어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 대답에는 “결코”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금지하신 것은 금지하신 것입니다. 또한 명령하신 것은 명령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애매하지 않고 분명합니다. 

한편으로,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대요리문답은 그런 점까지도 배려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시공간(時空間)의 한계에 속한 인간이 그것을 초월해서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는 없다는 겁니다. 답변 중에 나오는 “모든 특정한 의무를 어느 때에나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표현은, 이를테면 정상적인 감정을 가진 누군가가 그의 친구에게 닥친 기쁜 일을 함께 기뻐해주면서 동시에 동일 공간에서 또 다른 옆 친구에게 닥친 불행을 슬퍼해줄 수 없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프네요!) 친구와 함께 기뻐해주거나 슬퍼해주는 일은 각각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요 선행의 의무이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두 가지 의무를 동시에 이행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절은 또한 광신적인 신앙태도를 경계합니다. 아무리 좋은 신앙적 행위라 할지라도 아무 때나 지나치게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때와 장소를 가립시다!)
  
⑥ 한 가지 죄나 의무 아래에 같은 종류의 것들은 다 금해졌거나 명령되었는데, 그 모든 원인들과 방법들, 기회들, 현상들 및 그것들에 대한 자극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계명 해석이 풍부하게 확장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원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 눈앞에 드러난 행위뿐만 아니라 그 깊은 마음 속 동기까지도 율법은 지적한다는 겁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 자체로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무슨 핑계를 댈 수 있을까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십계명 해석의 영역을 넓게 확장시키는 것이 대체 어디에 근거하느냐고 누군가 질문한다면(특히 5계명의 확장에서 많은 질문이 들어옵니다만..),  예수님의 바로 이 해석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⑦ 우리의 지위에 따라 금하여지거나 명령된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지위와 의무를 따라서 이를 피하거나 행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⑧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된 것에는 우리의 지위와 사명에 따라 그들을 도와야 하며, 그들에게 금지된 것에는 그들과 동참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7번과 8번은 비슷해서 묶어서 해설합니다.) 율법은 나 자신의 도덕심을 함양/고취시키거나 나 혼자 득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웃과 함께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매우 직접적으로 신자의 사회생활과 인간관계 전반에 관련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황금률(黃金律)을 들 수 있겠는데, 누군가로부터 나의 지위가 보장받기를 원한다면 내 이웃의 지위도 보장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의무를 수행할 능력(Capacity)을 갖춘다면 이웃도 그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죄악을 남에게 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흔한 예로, 나 혼자 주일을 잘 지켜보겠다고 나대신 출근할 직원을 뽑는 행동을, 율법은 결코 옳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설령 그 직원이 믿지 않는 자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고요? 지난 글에서 도덕법의 대상이 모든 사람(Man)이었음을 기억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다가 그들과 함께 죄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오버입니다. 대요리문답은 친절하게도 8번 항목을 통해 그런 것까지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정말 친절하고, 목회적이며, 지극히 세련된 문답입니다. 

  
왜 이 고생을 해야 할까 

길고 긴 99문이 이제 끝났습니다.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십계명 해석 원리가 참 복잡하지요. 이걸 다 기억하고 적용하자니 귀찮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멋지지 않습니까? 성도의 삶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줄 십계명이라면, 적어도 이런 정도로는 주의를 기울이고 배려하면서 해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생스럽더라도 제대로만 할 수 있다면, 해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가치를 따져봅시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면서 십계명을 제대로 해석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계명이 제대로 해석되어 우리 삶을 하나씩 바꿔간다면 무슨 좋은 일이 생길까요?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이 거듭나서 올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 앞에서 잘 배웠다시피 -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기쁨을 가지는 순간 갑자기 모든 곳에 햇살이 비치며 “짜잔~” 하고 그가 거룩하게 바뀌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자의 수효가 늘어난다고 해서 곧바로 교회가 깨끗해 지던가요? 경험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어쩜 그렇게 교회는 여전히 문제가 많은 집단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 십계명이 자기 역할을 합니다. 거듭난 우리가, 교회가,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십계명이 빛을 비춰줍니다. 구체적으로 비춰줍니다. 그 등불에 의지하여 내가, 교회가, 올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은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입니다. 그 길이 고스란히 십계명 안에 담겨있습니다. 

많은 목회자 분들이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설교를 평생 들어도 바뀌지 않아요! ㅜㅜ” 그러나 여기엔 함정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십계명을 제대로 배워야 그들의 삶을 바꾸지요. 십계명을 제대로 가르쳐야 성도들이 그것을 자기 삶에 적용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도록 해주는 것까지가 목회자의 책무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해주십시오.

신자들은, 이제는 제발 십계명을 주제로 대화합시다. 교회 장의자에 앞뒤로 모여 앉아 회심의 은혜를 간증하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귓가에 떠도는 간증이 공허할 때도 많습니다. 받은 은혜에 합당한 실천이 빠진다면 그 삶은 공허하다는 말입니다. 간증도 감격도 중요하지만, 그런 모습으로만 십 년 이십 년의 세월을 반복하고 있다면 거기엔 문제가 있는 겁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그 삶이 달라져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게 되려면, 십계명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제로 그의 삶에 조금씩이나마 적용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게 되려면, 필요한 소양을 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기술을 배워야 할 수도 있습니다. 관련 정보를 얻어야 하거나,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방법을 습득/연습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마음을 쓰며 노력하는 신자가 교회에 바글바글 많아져야, 뭐라도 됩니다.

성도는 적어도 세상의 평균보다는 최소한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본래 훨씬 더 나은 도덕과 정의를 세상에 말해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도덕과 윤리를 한참 앞에서 이끌어줄 존재들이 우리 아니었던가요? 하지만 오히려 세상의 발목을 잡고 뒤쳐지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형편입니다.. 
  
십계명 해석 원리를 아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실천도 중요합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기왕에 이 글을 지금까지 읽어내신 여러분이 조금 더 힘을 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주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이 어려운 시대에 조그마한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옵기를 간구합니다. 주여! 은총을 베푸소서!

(후략)

글: 황희상 (특강 소요리문답, 특강 종교개혁사,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