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배운 장로교회 정치원리에 따라 교회 설립의 정의를 해보자면, "노회에서 필요에 따라 특정 지역에 새로운 '교구'를 개설하고 교구를 담당할 목사를 파송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정의문에 비추어 보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회 개척이란 말이 얼마나 뜬구름을 쫓는 것인지, 느낄 수 있다.
1.
노회에서 어느 지역에, 예를 들면 신도시가 생기면서 새롭게 출석할 교구가 필요하다 그러면, 거기에 교구를 개설한다. 그리고 그곳에 목회자가 필요하므로 노회 안에서 누가 담당할지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 원리이다. 이 원리 하에 세부적인 운영안이나 규칙이 나오는 것이고, 예외도 존재하는 것이다.
오히려 교회 '개척'이라고 말하려면, 교구도 노회도 없는 곳에 이주민이 발생하여 부락이 형성되고 그 수효가 늘어서 마을이 커질 경우... 그 '새로운 지역'을 커버할 '노회'를 만드는 것을 일컫는 것에 가깝다. 즉, 요즘같은 현대 사회에서는 대략 "선교사"에게 해당하는 말이 되겠다. 누군가 "교회 개척을 했어요"라고 말하려면, 그 지역엔 성도들이 출석할 교회가 없고, 그래서 교회가 행정력을 발휘하여 "노회를 새로 하나 파야겠네"라는 합리적 판단이 전제 되어야 한다. 그런 판단 없이 어느 목사가 어느 날 어느 동네에 교회를 개척해야징 해서 부동산에 임대를 알아보고 다니는 것은,
... 사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정확히 잘 모르겠다. 개업?이라는 표현이 가장 가까울 것인 바, 세속 정부에서도 이미 그렇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등록"하려면 "사업자 등록증"을 요구하고, 대표자 이름을 적는 자리에 담임목사 이름을 적도록 안내하고 있다. (물론 이는 교회가 세속 권력에게 언젠가는 시정을 요구해야 할 폐단에 속한다. 물론 왜 그렇게 고쳐야 하는지 교회 스스로가 먼저 깨닫고 이해하고 대안을 수립한 뒤에 말이다.)
2.
다시 교회 설립으로 돌아와서, 노회가 교구를 하나 늘이려고 할 때는 교구를 맡을 목사가 하나 남아서가 "아니라" 그 교구에 속할 "성도들"이 먼저 존재하기 때문이어야 한다. 성도들이 모여서 교구를 이루고자 하여 노회에 설립 청원을 하면 노회가 반응하여 허락을 하기 이전에 그 교구를 맡을 목회자를 천거하고(혹은 성도들이 원하는 목사후보생이 있을 경우 그를 우선시하여), 성도들이 또한 반응하여 이를 수납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 노회가 설립 청원을 허락함으로써 새로운 교구 하나가 탄생한다.
이때 노회는 교구원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확인한다. 우리가 파송하는 목사의 생활비를 제대로 줄 것인지, 확실한 대답을 듣고 나서 생명의 지장이 없다는 확신이 들 때 파송하는 것이다. 그렇게, 교구 목사와 그 가정의 생활비는 첫날부터 교구민이 책임진다. 이걸 노회에서 책임지는 형태로 가면 피라미드 구조를 탈피할 수 없고, 목사 개인이 책임지는 형태로 가면 아사를 피할 수 없다. 혹은 살아 남더라도 설교에 알곡이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에 대하여 교구민들이 "저희는 얼마씩을 드리기로 약조합니다"라고 분명히 대답한 뒤에 노회는 목사를 파송한다. 물론 서로가 맞는 관계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짐이 상호 합리적이겠으니 목사 위임은 조금 미루곤 하는데, 이는 원리라기보다는 운영의 묘에 속한다.
교회 개척이라는 말을 하거나 혹은 들을 때 이러한 기본적인 원리들을 기억하고 있어야 사람이 이상해지지 않을 수 있다. 요사스러운 꾀임이 많은 시대이기에 더더욱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3.
자연스럽게 청빙의 정의도 나온다. "교구민이 노회에 속한 목사후보자에게 교회의 목사 직분을 맡아달라고 청하면서 생활비를 책임지기로 약속하는 것" 정도가 되겠다. 그러면 노회는 청빙을 받은 목사후보생에게 "안수"하여 해당 교구의 목사로 보낸다. 이것이 목사 안수이다. 교구를 맡아 안수를 받는 그 때 비로소 "목사"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자가 세워지는 모습"이란 모두 이런 식이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그렇게 안수를 받음으로써 교회의 직분자가 된다.
* * *
장로교회 정치원리는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그저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교회가 되도록 하려는 최선의 노오력일 뿐이다. 오늘날 교회의 구조가 너무도 많이 변형되어서 이런 소리가 참으로 한심한 헛소리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다시 말하지만, 최선의 노오력일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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