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정치의 종류에는 장로회정치도 있고 감독제도 있고 심지어 교황제도 있고, 뭐 다양하다. 자기 교회가 어떤 정치체제를 가졌는지는 교회 이름(교단 이름)에 담긴 뜻만 잘 확인해봐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하자면 탁상공론과 같은 것인바, "실제로" 그 교회를 움직이는 정치체제가 무엇인지는 교회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파악될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장로교회라는 이름 안에도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각주 달고 싶다)가 공존하고 있으며, 공화제(각주 달고 싶다)와 독재제도가 공존하고 심지어 전제정치(여기도 각주 달고 싶다)도 행해지고 있다. 특히 장로교회는 그 이름이 가진 찬란한 가치와는 달리 "당회"라는 치리기관의 '1당독재'와 "우리 교회"라는 공동체의 '전체주의'에 매몰되곤 하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그 본연이 가진 정체성과 의미는 전혀 그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설픈 우리 스스로가 장로교회를 그렇게 잘못 사용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제도가 지향하려는 가치와 경계하려는 오류"에 있지 아니하고, 그 껍질의 보호 안에서 쉽게 안정을 취하려 하는, 일종의 게으른 죄악 탓이다. 어찌 보면 우리 삶은 허상적 이데아 속에서 스스로를 어떤 명목하에 규정하고 안주하는 선택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다.
교회는 당연히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며, "성경적" 원리로 운영되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성경적이라는 단어가 가진 폭력성을 우린 너무 쉽게 간과한다. 성경적이란 말은 성경에 명시된 것뿐만 아니라 그 성경을 인간이 해석하는 것인데, 이 해석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빛이 분명히 있지만 동시에 해석자의 자기 성향과 스타일이 필연적으로 반영된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치리자들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고 추진하는 그 어떤 정책과 방침이 왕왕 신자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성경적이라 죄인들의 습성이 이를 거부해서"가 꼭 아니다. 오히려 신자들 각자의 마음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진리 안에 참 자유를 누리게 하사, 인간 냄새가 나는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거역하는 까닭인 경우가 훨씬 더 잦다.
따라서 교회정치는 제도의 완성으로 끝을 본다 생각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 실제로는 제도 안에서 타락할 가능성이 여상하므로, 항상 겸손하게 자기 의견을 낮추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한 개인 혹은 1당독재와 전체주의가 갖는 위험성을 상호 경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게 되려면 제도의 개혁도 필수적이지만, 인간의 개혁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 신자가 바라보는 가치의 전도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 이 뻔한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고 또한 눈물로 경주해야 할 이 순간의 숙제가 아닌가 싶다.
바꿔 말하자면... 제도의 개혁이 아직 부족한 교회도, 그걸로 좌절하지 말고, 바라보아야 할, 그리고 변하지 아니할 가치를 붙잡으며,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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