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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은 최소 4백년 시간의 강을 건너온 사상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이 지금 여기서 무슨 의미를 가지려면 과거의 언어를 반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신앙과 이성(이성은 계속 업데이트 됨), 계시와 문화(문화는 계속 그 형태를 바꿈)의 긴장, 그리고 공동체적 실천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축 위에 늘 두 다리를 디뎌야 한다.
 
바빙크는 “자연은 은혜에 선행하고, 은혜는 자연을 완성한다”고 했다. 신앙이 이성을 배제하는 순간, 그것은 맹목이라 한다. 반대로 이성이 신앙을 압도하는 순간, 신비와 경외는 사라진다. 개혁신학은 이 둘의 조화, 곧 계시와 이성의 긴장 속에서 진실과 균형을 추구한다. 따라서 개혁신앙인은 유적을 답사하는 고고학자보다는 거리에서 사진을 찍는 작가의 추구미에 더 가깝다. 신앙은 박물관이 아니라, 이성적 사유와 대화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 되어야 한다.
 
 
 
문화는 개혁신앙이 상대화시킬 적이 아니라, 스며들어야 할 토양이다. 바빙크와 카이퍼가 강조한 것처럼, 개혁신학은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인간, 사회, 과학, 예술, 정치 등 모든 영역을 새롭게 해석한다. 현대의 다원주의와 상대주의, 과학만능주의 앞에서, 개혁신학은 자신의 틀로 세상을 다시 읽는다. 이 틀은 현실을 낙관도 비관도 아닌, 현실 그대로 인식하되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게 되려면, 개혁신앙인은 공동체적 실천과 사회적 책임의 베이스 위에 서야만 한다. 이것 없이 울려퍼지는 설교만큼 공허한 것이 없다. 신앙은 개인의 내면에 갇히지 않는다. 교회는 세상을 등진 바위섬의 요새가 아니다. 불의와 빈곤, 환경 파괴와 폭력, 독재와 억압, 차별과 혐오, 이 모든 사회적 아픔 앞에서 개혁신학은 침묵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성경의 권위와 충분성, ‘항상 개혁되는 교회’의 정신,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의 확립이라는 전통적 베이스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위에, 신앙과 이성, 계시와 문화의 긴장 속에서 균형을 잡고, 공동체적 실천과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감당할 때, 오직 그럴 때에만, 개혁신학은 진정 살아 있는 대답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 특히 개신교가 지금만큼 힘이 없을 때가 있었을까. 개혁신학이 다시금 오늘의 언어로, 오늘의 아픔과 희망을 품고, 새로운 강을 건널 준비를 해야 하고, 또한 그럴 수 있으리라 바라고 믿는다.

 

______ ※ 이 글은 제가 그동안 썼던 책과 각종 습작들을 In-context 학습한 Ai가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