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563년에,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은 1647년에 만들어졌다. 수 백 년 묵은 쉰내가 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질문한다. 이런 구닥다리에 왜 관심을 두느냐고. 요즘 끼깔나게 좋은 콘텐츠가 얼마나 많은지 보라고. 과학도 학문도, 심지어 성경해석조차 발달하기 이전의 고리타분한 내용을, 오늘날 첨단을 걷는 성도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가당키나 하느냐고. 심지어 그것은 무지와 암흑의 중세로 돌아가려는 헛발질 아니냐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사실상 질문이 아니다!)은 일종의 '자문화 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이는 꼭 나라와 민족 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시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과거의 시대보다는 '당연히' 더 발전하였고 더 위대하다는 발상은, 과거의 산물에 대한 무지의 소치요 교만일 수 있다. 그렇게 따지면 그리스/로마 문화를 다시 부흥시킨 르네상스도 없었고, 종교 개혁도 없었다. 문제는 '과거 시제'에 있지 않고, 그 과거를 오늘에 어떻게 계승 발전하느냐에 있다.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현재에 대한 교만의 다른 이름이자, 과거에 대한 무례이다. 과거의 눈으로 볼 때 우리의 학식과 문화적 성숙도의 박약함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핵심 가치는 어쩌면 ‘겸손’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내가 가진 세계관과 사고방식과 판단력이, 지난 수천 년 역사 속에 인류가 품어온 그것보다 더 낫다거나, 진리에 더 가깝다고 그저 믿기엔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아무리 많은 경험을 축적한 사람도 역사 속에서 보면 그의 삶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며, 그의 앎은 단편적이다. 때문에, 현재 진행형의 이 시대 속에서 반짝 머리를 스치는 생각보다는, 역사 속에 경건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오랜 시간 고민하여 생각을 정리한 결과물이 있다면 그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보는 전제… 이것이 신앙의 핵심을 감히 ‘겸손’이라고 표현해보는 이유이다.
이런 자세의 출발은 과거에 '개혁된(reformed) 것'이 무엇인지 면밀히 살피는 일부터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조'와 요리문답'이 소중하다. 진리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으며, 그 시대 성도들에게 대답이 되었다면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대답이 될 수 있도록 빛 바랜 텍스트 속에 숨은 의미를 끌어내주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일선 교회교육의 현장 속에서 실제로 사랑받으며 사용될 수 있는 교리교육 교재와, 그것을 또한 존경받으며 가르칠 수 있는 준비된 교사가 마련되어야 하며, 그것이 또한 계속 개선되어야 한다.
신조와 요리문답은 변치 않는 가치를 담고 있다. ‘시대초월적 가치’이다. 문제는 그 항구적 가치를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 시대의 수용자들에게 그 시대의 입장이 되어 전달할 수 있느냐이다. 그 저작물이 당시 어떤 문제에 봉착하여, 혹은 어떤 시대정신에 대항하기 위하여, 어떤 수용자들에게 주어졌던 기록이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네 어떤 모습과 상황에 대답이 되고 유익이 되는지 밝혀내는 작업은, 그래서 이 시대를 위한 소중한 과업이자,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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