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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설 / 2005년, 기독교개혁신보 기고문

 

수년 전 캐릭터 사업이 고부가가치 이익을 가져다 주는 분야로 주목받으면서, 기독교계에도 소위 '예수님 캐릭터'가 등장했습니다. 때론 할아버지 같은, 때론 젊은 청년의 모습이나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캐릭터들이 열쇠고리에, 가방에, 엽서에 '예수(JESUS)'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어린 성도들을 위해 만들어진 각종 성경교육용 교재에도 예수님 형상은 '생생'하고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신앙을 표방하는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어떤 형태로든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묘사하거나 만드는 일을 거절하거나, 적어도 그 사용에 있어서 아주 심사숙고합니다. 특히 공적인 예배에 위와 같은 형상을 도입하는 시도는 철저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실제 인물이었지 않습니까? 만화로, 또는 그림으로 그린다면 성경을 전달할 때 상대방이 더 쉽고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사도들이나 유명한 목회자, 순교자들을 성상으로 만들고 마리아나 천사까지 눈에 보이는 조각상으로 만들어 예배에 사용했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상숭배를 철저히 반대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칼빈 선생인데요. 뭐라고 했는지 보시겠습니다.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상권) 제 11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라구요. 대단히 강한 표현이지요?

성경은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여러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이전, 짐승을 쪼갠 사이로 횃불로 나타나서 그 사체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손을 주겠다는 약속을 굳게 나타내셨고 아브람은 이를 더욱 강하게 믿게 되었지요. 그 외에도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소에서 등등 많은 형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처럼 그가 구약 백성들의 눈에 보여주셨던 형상은, 그러나 그의 존재 자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구약백성들을 위해 특별한 계시의 방법을 사용하신 것일 뿐입니다. 이를 그래서 하나님 '존재의 현현'이라고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하지만 '성자 하나님(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땅에서 사셨으므로, 실제로 그분 얼굴을 본 사람들도 역사 가운데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얼굴을 그리는 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 아닌가?'하는 의문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한 존재로 오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도, 신적인 권능과 무소 부재하심 등의 신성을 고스란히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형상화하는 작업은, 그분의 신성을 보는 눈이 없는 인간들의 한계로 인하여, 결국 그 분이 가진 신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우리 인식 속에 담아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가르쳐 주시는 방식(성경과 말씀, 계시) 외에는 하나님을 가르칠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전적 타락한 존재이며 매우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실제로 어떠하였는지를, 후세대의 교회에 기록물로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정말 그것을 원하셨다면 예수님 생존 당시 로마 정부에 의해 공증할 수 있는 초상화를 남겼거나, 아니면 신문과 방송이 대중화 되고 디지탈 카메라가 발명된 이 시대에 예수님이 오시거나, 아무튼 무슨 수를 내셨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여러 가지 이유로 형상화하거나, 그 분을 형상화한 것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일어난다면, 그러한 마음을 단호히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백성이라면, 매사에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 전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더 편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기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데 더욱 열심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캐릭터를 교육에 쓸까 말까를 고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안에 가두려는 시도는 어리석을 뿐입니다. 말씀이 가라 하시는 데까지만 가고, 서라고 하실 때는 서는, 그런 착한 자녀들이 됩시다. 주님 말씀을 그대로 듣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