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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까지 와서 아내의 컨디션은 여전히 별로였고, 나도 많이 지쳤지만, "아치스 국립공원"을 코앞에 두고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고 새벽에 혼자라도 일출을 보러 다녀오라고 했다. 결국 나는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동 트기 전에 아치스 국립공원 중에서도 꽤 깊은 지역에 속하는 "데빌스 가든"까지 차를 몰았다. 참고로, 새벽에 들어가면 요금소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무료 입장이다.ㅋㅋ 물론 나는 이미 그랜드 캐년에서 미국의  모든 국립공원에 1년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애뉴얼 패스를 구매했으니 상관 없지만.

참고로 구글맵에는 왜때문인지 한글로 "알처스 국립공원"이라고 뜬다.
이 블로그에서는 대체로 구글맵의 지명을 따라 표기하지만, 이건 좀 곤란하다. ㅎㅎㅎ

데빌스 가든에 도착해서 바위 틈으로 걸어갔다. 이름부터 으스스한데, 새벽에 혼자서 적막한 광야를 걸으니 기분이 참 오묘했다. 두근두근 설레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하고... 차가운 새벽 공기에 머리는 어느 때보다도 맑은 기분이었다.

 

해 뜨기 전과 해가 뜬 뒤, 랜드스케이프 아치의 변화. 오른 쪽에도 작은 아치가 하나 더 보인다. 듣자하니 이 아치를 볼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저거 오래 가지는 못할 거라고... 실제로 이곳 아치 국립공원의 몇몇 아치는 이미 무너졌고, 지금도 일부분이 무너지는 중이라고 한다.

 

이제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주차장 쪽으로 나가는데 알 수 없는 벅찬 느낌과 허탈한 느낌이 교차한다. 이걸 보려고... ㅎㅎㅎ
무너지기 전에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를보여준다.
주전자 뚜껑처럼 생겼다고 생각하고 지도를 보니 이름이 Pothole이다. ㅋㅋ

 

숙소에 가서 아내를 만나서 함께 조식을 먹고 다시 아치스 국립공원으로 들어왔다. 아까 아무도 없을 때 슝 들어왔던 입구에는 9시가 넘자 차들이 밀려서 우리도 15분 가량 줄을 섰다. 혹시 여기 오실 분이라면, 아예 새벽에 입장하시기를 강력히 권한다. 줄도 줄이지만, 보이는 그림이 다르다.

아내가 많이 걷기를 힘들어해서, 우리는 주로 주차장에서 가까운 아치들을 보러 다녔다.
멀리서 볼 때는 느낌이 잘 오지 않았는데  가까이 왔더니 정말 거대하다.
뒤로 돌면 Turret Arch가 보인다. 주차장 근처에도 아치들이 여러 개 있다. 하지만 워낙 대단한 걸 많이 봐서, 눈에 차지 않는다. 한국에 저런 거 하나만 갖다놔도 난리가 날 것인데... ㅎㅎㅎ

샌드 듄을 혼자 보고 온 아내의 일기장 한 소절을 옮겨 적는다.

"사라하 사막이 처음엔 이랬겠다 싶었다. 거대한 사암이 더위, 추위, 물, 바람에 부서지고 깎여나가 결국 모래만 남는다. 빌딩만 한 암석 사이로 들어가보니 고운 모래밭이 형성되어 있다. 주변에 연세드신 노부부 두 커플이 계셨는데 한 부부가 코믹해서 나도 덩달아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일행과 떨어져 나 혼자 거니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순간의 고요와 함께 그이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바닥에 무수히 난 발자국에 의지해 트래킹을 마치는 그 과정이 우리 인생처럼 느껴졌다. 그이가 지금 함께 하지는 않지만 이미 기쁨을 맛본 자로서 내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느끼며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고 행복했다."

이 뒷부분은 너무 사적이고 신앙적인 적용이라 여기서 줄인다. ^^;

나는 그동안 주차장 근처에 있는 마른 나무에서 이러고 쉬었다. ㅎㅎㅎ

엊그제 그랜드 캐년에서는 눈이 내렸는데, 이젠 해가 너무 강해서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목도 마르고 슬슬 지쳐갔다. 그래도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아치를 먼 발치에서라도 안 볼 수는 없었다. 델리케이트 아치(Delicate Arch). 아래 사진이다. 사실 이곳은 로워 뷰포인트이고, 30분쯤 걸어 들어가면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데... 우리가 걸어 들어가려는 순간 나오던 사람이 우릴 보고 웃으며 놀린다. "이처 로오오옹~ 웨이~" ㅋㅋㅋ 바로 포기! ㅋㅋㅋ 아래 사진만 남겼다.

 

평가하자면, 내가 지금까지 본 세계 최고의 국립공원이었다. 어떤 점에서 가장 큰 점수가 주어졌냐면, 이렇게 신비로운 장소를, 이렇게 쉽게 접근하게 해놓았다는 점이다. 설렁설렁 볼 사람은 차를 타고 드라이브만 해도 되고, 깊이 느끼고 싶은 사람은 어디든 간편하게 주차해놓고 걸어 들어가면 그때부터 탐험이 시작된다. 특별한 제약도 없고, 알아서 잘 다니면서, 지킬 건 지키는 국립공원.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그냥 되는 일도 아니다. 이것은 실력이다.

미국 서부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가장 부러움을 넘어선 질투를 느낀 것은 물론 놀라운 자연 환경도 있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버리고 마음껏 누려버리는 미국의 언터쳐블한 실력,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