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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스털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안워쓰를 들르고, 이후 코스를 정하면서 나는 한 순간도 고민한 적이 없었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거슨 바로바로,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라고 이름 붙여진, 고대 로마제국의 북방한계선(?) 장벽과 로마군 전초기지 터였다. 원래부터 여기에 판타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다가 2004년에 나온 영화 "킹 아더"를 보게 된 바람에 나의 호기심은 천장을 뚫어버렸다. 

(그밖에도 센츄리온이나 디 이글 등의 관련 영화가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오는 킹 아더를 쳐준다.)

이곳에 가기 위해 우리가 묵은 숙소는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 쪽으로 건너오기 직전에 있는 마지막 휴게소, Gretna Green 이라는 동네의 휴게소였다. 

숙소도 있고, 버거킹, KFC, 스타벅스 등 익숙한 프랜차이즈도 많은 여기서 편하게 묵으면서, 당일치기로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몇 군데 찍고 다니기로 했다. 이 방벽은 어느 한 곳에 딱 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천리장성처럼 길게 늘어서있는 방벽이므로(아래 지도는 그 중에서 중심 지역에 속함) 방벽을 따라 이동하면서 중요한 몇 군데를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를 풀로 투자할 수 있도록 교통이 좋은 인근 고속도로 휴게소를 잡은 것이다. 사실 '칼라일'까지 내려와서 숙소를 잡으면 더 가깝긴 한데, 나는 국경지대의 스코틀랜드 마지막 동네 분위기도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곳이 숙소 가성비가 좋다.ㅋ)

우리 부부는 HBO 드라마 ROME을 함께 즐긴 바 있다. 그래서 로마제국의 역사와 관련해서 공감하는 바가 많고, 이런 곳에 가서도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아내의 일기中 일부를 인용한다.

토요일엔 하드리아누스 방벽에 다녀왔다. 기원후 124년에 지어진 장벽이자 병영처소다.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지만, 드라마 Rome 시리즈의 초반부, 삼두정치 시절 율리어스 시저가 변방에서 게르만족과 전투를 벌이던 장면,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어린 시절 전투노예와 무예 연습을 하던 장면들이 머리 속에 떠올라, 그 시절을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됐다. (문란하고 잔인한 장면만 빼면, 드라마 Rome은 로마 시대를 이해하는 데 최고의 학습 컨텐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영국을 지도에서 보면 토끼 모양인데,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토끼의 목걸이처럼 동서로 쫙 선을 긋고 있다. 트라야누스의 후대 황제로 등극한 하드리아누스는 선대 황제의 국가 팽창주의를 멈추고 내실을 다지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리스 헬레니즘의 신봉자로서, 세계 곳곳의 거의 대부분의 로마 영토를 순방하며, 자유롭고 합리적인 헬레니즘적 사상을 불어넣어 방대한 로마 제국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을 잘했던 만큼, 그리스도인들이나 유대인들로서는 살기 힘들게 만든 황제였기도 하다. 제1차 유대 반란 전쟁 때, 무려 6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사람이다.)

20년 정도 지나, 다른 황제가 동서로 이어진 방벽을 하드리아누스 방벽보다 훨씬 더 윗쪽에 하나 더 건축한다. 영토를 또 넓혔다는 뜻.

그이에 따르면, 따뜻한 로마에 비하면 읍습하기 짝이 없는 영국은 로마의 장수들에게는 일종의 가기 싫은, 좌천지나 다름 없는 곳이라 한다. 가장 일하기 힘든 조건에서 덜 문명화된 바이킹, 게르만족과 싸워야하는, 영국의 로마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갔을까...

날씨가 안 좋아서 오후쯤 될 때까지 쉬다가 점심 먹고 길을 나섰다. 먼저 간 곳은 Brampton - Turret 48A 이라는 곳이었다. 차로 30분 정도 걸렸다. 인근 초등학교 옆 주차장에 주차하고(무료) 조금 걸어 들어가면 된다.

방벽을 따라 걷는 트레일 코스를 알리는 간판. 저 우물 모양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의 문화유적들을 알리는 아이콘이다.
성벽을 따라 걸을 수 있고, 성벽 위로도 올라가볼 수 있다. 실제로 성벽은 훨씬 더 높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석재가 주위로 다 흩어져버렸다.
이 동네 오래된 건축물과 담벼락은 아마 거의 다 이 성벽 석재를 가져다가 사용해 왔던 모양이다.

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Birdoswald Roman Fort 라는 곳이다. 이곳에는 로마군 기지 유적이 꽤 큼지막하게 남아있다. 따로 전시관도 있고 입장할 때 요금도 받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비지터센터와도 같은 곳이다.

방벽 쪽에서 북쪽 방향(스코틀랜드 쪽 방향)을 바라본 모습. 아 뭔가 막 짜릿하다!!
날씨가 별로 안 좋았음에도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모들이 데려오는지 가족단위로 많이들 이곳을 찾았다.
절반 정도는 곧바로 방벽을 따라 트레킹을 한다.
 방벽의 돌은 그야말로 세월의 흔적을 확실히 느끼게 해준다.
꼭 요금을 내고 박물관을 거쳐서 입장하지 않아도 밖에서 방벽 주위를 걸을 수는 있다.
비지터 센터처럼 생긴 건물들이 모여있고 여기서 커피도 마시고 화장실도 쓸 수 있다.
커피 맛있다!

잉글리쉬 헤리티지는 우리나라 문화재청 비슷한데, 적극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는 산하기관의 성격이다. 저 아이콘이 붙어있는 문화재나 유적들이 전국에 엄청 많은데, 각각 입장료가 따로 있지만, 돈을 내고 무슨 회원이 되면 대부분 무료 입장이 되거나 할인이 되거나 줄을 덜 서거나 하는 혜택이 있다. 무엇보다 엄청난 혜택은 입장할 때 주차장까지 무료라는 ㅋㅋㅋ 우리같은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멤버십도 있다. 일정 금액을 내고 일정 기간 내에 전국의 잉글리쉬 헤리티지를 무료로 방문할 수 있다. 내가 대충 계산해봤는데, 스톤헨지 하나만 봐도 그 멤버십 가격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유적지 방문을 많이 할 사람은 무조건 구매해야 할 멤버십이라 하겠다.

★ 자세한 정보는 아래 페이지에서 찾도록 하자.

 

Join English Heritage | English Heritage

 

www.english-heritage.org.uk


우리는 멤버십도 없고 코로나 시국에 박물관 입장은 자중하고 있어서 바로 방벽 쪽으로 나갔다. 입구가 없어 보이지만, 앞의 글에서 스톤헨지 가면서 소개했던 방식으로 울타리를 열면 Public Path가 나온다.

짜잔.
다만 이 길에 들어설 때 소똥이 많으니 조심!! 아주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이것이 무려 2천 년 가까이 된 유적이다......
다치니까 웬만하면 방벽 위로 올라가지 마라고는 적혀있지만 그 누구도 안 올라갈 수 없는 그런 현장이랄까 ㅎㅎㅎ
이곳은 서쪽 문이다. 바닥 돌에 깊이 패인 홈은 아마도 나무로 된 성문의 회전축(?)이 꽂혀있던 곳일 듯...
서쪽 문 앞에는 사령관 관사가 있었다고 한다.
기지 성곽의 흔적. 보통 전초기지 수준이라면 이렇게 정성들여 돌로 쌓지 않았을 것이고, 영구적인 기지로 건설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이 있겠나...
이곳은 일반 사병들의 취침 공간. 이곳에서 발굴되었다는 주사위.
여기서 병사들이 두려움의 대상 혹은 미지의 세계였던 북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이곳은 남쪽 문이다. 남쪽은 로마인들에겐 고향이 있는 방향이다.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남쪽 성곽 위에 올라서서 바라본 모습이다.
여기서 북쪽을 보면 박물관 건물이 보인다. Public Path는 여기까지.
근데 나가는 길을 못 찾고 결국 무단(?)으로 박물관 안쪽까지 들어가게 되었;;
기지 내 건물들의 흔적. 이곳에서 병사들이 훈련을 하거나 교육을 받던 공간이라고 한다.

브리튼 섬의 허리 부분, 오히려 상복부(?)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동서로 가장 짧은 부분에 설치한 하드리아누스 방벽. 직접 만나보니 개인적으로는 정말 좋았다. 2천 년의 세월을 넘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자그마치 2천 년이나 흘렀는데도 지금 이 수준으로 방벽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참 신기하기도 하고....

또 다른 곳으로 왔는데 슬슬 지쳐서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하드리아누스 방벽 답사하기.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렇게 또 하나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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