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가볼 곳은, 아무리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본, 하지만 어디에 붙어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카노사'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이탈리아 발음으로 엔리코 4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용서를 빌러 찾아왔다는 카노사 성. 소위 "카노사의 굴욕"이란 말로 유명한 바로 그 장소이다.
3년 전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이곳은 마음 속 최우선 방문지역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동선을 짤 때는 골칫거리였다. 주요 대도시로부터 꽤 떨어져있고, 도시간에 이동하다 들르려고 해도 동선이 애매했다. 지도상으로는 직선거리로 가깝게 보이지만 네비 찍어보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걸로 나왔다. 이곳이 아주 깡시골, 보호지역 한 가운데 있는 산 꼭대기에 있는 탓이었다. 웬만한 이탈리아 여행자도 그래서 카노사에 들르기는 쉽지 않다. 나 역시 피렌체에서 다녀올까, 제노바에서 돌로미티 가는 길에 지나갈까 많은 고민을 하다가, 최종적으로는 볼로냐 일정 중에 반나절 휭 다녀오기로 했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하다보면 계획대로 안 돌아간다. 볼로냐 호텔 채크인 시간이 오후 3시부터 시작하는데 베네치아 캠핑장 채크아웃은 10시였다. 중간이 붕 떴다. 그래서 카노사에 먼저 갔다가 볼로냐로 가는 걸로 급 일정변경을 했다.
문제는 이탈리아 북부가 워낙 산업이 발달한 데다가 볼로냐는 특히 자동차 관련 회사들이 많은 관계로, 인근 고속도로가 꽉꽉 막히더라는 것... 결국 카노사에 가기도 전에 점심시간이 됐다. 우리는 휴게소 맥도날드에 들어갔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 이탈리아 북부 맥도날드에서는 커피를 팔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자존심인 커피를 미국 페스트푸드 점에서 아메리카노로 만들어 파는 꼴을 도저히 못 보겠던지... 맥도날드에서는 콜라나 아이스크림은 팔지만 커피를 마시려면 옆에 별도로 있는 이탈리아식 까페로 가야 했다. 물론 이것은 지역마다 조금 다른 듯한데, 이후에 볼로냐와 아씨시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더 했기에 참고삼아 적어둔다.
아무튼 그렇게 점심을 먹고 우리 렌터카는 카노사의 영주 마틸다가 다스리던 바로 그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드넓은 평원이 끝나고 완만한 경사의 구릉지대가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 이곳이 과거에 마틸다의 영토였음을 당당히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구릉지를 따라 여러 작은 마을을 지나서 구비구비 오르막길을 한참을 오르면 어느 순간 경치가 탁 트이면서 능선을 따라 난 산길 도로를 타게 된다. 교통량은 아주 적어서, 그 능선 길을 홀로 달리는 기분이 왠지 꿈결같고 나른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앞에 떡하니 바윗덩어리가 보인다. 순간적으로 저것이 카노사 성 아닐까 하는 느낌이 와서 급정거를 했다. 아내는 "저게 카노사 성이라고? 안 보이는데??" 반신반의하며 사진을 찍어준다.
맞았다. 여행 준비하면서 구글맵으로 몇 번이고 봤던 바로 그 갈림길이다. 이곳에 최근에 새로 생긴 주차장이 있고, 거기에 차를 대놓고 걸어서 접근하는 것이 정석이다. 아내는 저게 정말 카노사 성이 맞는지, 정말 이 길로 걸어가면 되는지 거듭 묻는다. 내가 요즘 신뢰를 많이 잃었나 ㅎㅎㅎ
나중에 알았지만,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한, 번듯한 입구나 입장권 파는 곳은커녕 성벽이나 성곽조차 안 보이는 그냥 바위덩어리인데 카노사 성이라며 흥분하는 남편이 잠시 미덥지 못했나보다. 게다가 주위엔 인기척도 없고, 주차장도 텅 비어있어서 불안하고... 무엇보다 땡볕에 저길 걸어서 올라갈 생각을 하니 아찔했을 터...
아내를 격려하며 계속 걷다 보니 멀리서 웬 꼬마아이가 빼꼼히 내다본다. 누가 있긴 있는 모양이라며 힘을 내본다.
가까이 가보니 꼬마의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분이 돌바닥에 기대 앉아 책을 읽고 있고, 꼬마는 그 주위를 서성거리며 놀고 있다. 바로 앞에 비지터센터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긴 한데 인기척이 없다.
더구나 올라가는 길은 철문으로 잠겨있다. 못 들어가나??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건만 낭패로구나 싶었다.
그냥 가면 아까우니 주변 사진이나 많이 찍자 하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마틸다 동상이 먼저 보인다. 이제 하인리히는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아까 그 꼬마 아이와 같이 있던 젊은 여자분이 심드렁히 묻는다. "너 위에 올라가고 싶어?", "YES!" "그러면 4유로 내야 해." 갑자기 나에게 "4딸라!"를 시전하신다.
우리는 누구한테 돈을 내라는 것인지 의아해 하면서, 그래도 어쨌거나 성에 들어갈 수는 있나보다 싶어 기쁜 마음으로 둘이서 8유로를 꺼냈다. 근데 이분이 가방을 열더니 거스름돈 뭉치 사이에서 열쇠를 꺼낸다. (응?) 그렇다. 꼬마아이의 엄마가 바로 카노사 성 내부에 있는 박물관의 관리인이었던 것! 그냥 동네 주민 혹은 관광객인 줄 알았는데 대반전이다. ㅋㅋㅋ
여행 준비할 때 인터넷에서 본 바로는, 카노사 성을 찾아오는 사람이 얼마나 없었으면 이곳 박물관 직원이 누가 찾아오면 그렇게 잘 해준다던데, 설마 이분이 그분일까?? ㅎㅎㅎ 하긴, 지금 오후 시간인데 아직도 문이 잠겨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비인기 종목이긴 한가보다.
근데...
문만 열어주는 줄 알았더니 앞장서서 걸으신다... 우리는 꼼짝없이 뒤따라 올라가면서 잠시 어색한 침묵......
'당신은 누구며, 우린 그냥 잠자코 따라 올라가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혹시 지금 우리가 가이드 투어를 받는 것인지?' 등등... 우리는 이 낯선 상황이 어색하고 궁금했지만,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쌍방에 더듬더듬 영어를 하긴 했지만 우리가 사용한 "가이드 투어"라는 용어의 뜻 자체를 못 알아듣는 눈치여서... 그 와중에 꼬마는 우리가 하는 말을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따라하기도 했는데, 엄마는 "얘 요즘 영어 배우고 있어서 저런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ㅋㅋㅋ
올라가면서 보는 주위 경치. 저 멀리 능선 끝 뾰족한 바위 봉우리에 성 하나가 더 있다.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 굴욕하러(?) 왔을 때 카노사 성문 앞에서 맨발로 벌벌 떨며 3일을 지냈다는 썰이 우리 머릿속에 박힌 장면이지만, 실제로는 저 성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팩트 체크는 추후 해보기로...
이분이 앞장선 이유가 있었다. 열어야 할 문이 더 있었다. 그리고 박물관 문도 열어야 했고, 불도 켜줘야 했고 ㅎㅎㅎ 말하자면 우리가 도착한 바람에 안 해도 될 출근을 하시게 된 셈이다. ㅋㅋㅋㅋㅋ
저기 보이는 능선을 따라 난 도로를 우리 차가 지나왔다. 갈림길 앞 주차장에 우리 차가 보인다.
직원분은 우리에게 이쪽 저쪽이 각각 무슨 지방인지, 무슨 도시는 어느 방면에 있는지를 알려주셨다. 이렇게 보니까 카노사의 지정학적 위치가 절묘했다. 사방에서 군대 병력의 움직임은 물론 조그마한 달구지 하나의 이동이라도 대번에 알 수 있는 기가막힌 위치였다.
박물관 내부 진입. 로비에 커다란 카노사 성 모형이 있고,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짧고 간단했지만 어쨌거나 가이드 투어 비슷한 것이 진행되었다.
버튼을 누르면 작동되는 모형이었다. 성 내부 구조를 볼 수 있도록 한 조각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안쪽 룸이 보였다.
문제의 하인리히 4세(엔리꼬 4세). 우측 상단에 교황과 함께 이곳 영주였던 마틸다의 모습도 보인다.
이 성의 주인이었던 마틸다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그림들. 카노사의 굴욕 사건의 중심에 마틸다가 주요 인물로 부각되어 있다. 실제로 마틸다는 당시 이 지역에 국한된 세속권력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영향력도 컸다고 한다. 그래서 교황도 당시의 복잡한 정황에서 우선 이곳으로 몸을 피했(?)던 모양이다.
박물관 곳곳에는 이 성과 관련된 유물들과 무너진 성의 잔해들, 지도 등이 더 전시되어 있다.
마틸다의 가계도
박물관에서 어느 정도 지식을 섭취한 뒤 밖으로 나왔다. 성은 지진 등으로 인하여 벌써 오래 전에 무너져서 폐허만 남아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이곳에 실제로 와봤다는 사실, 그리고 이곳까지 오가는 길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그 느낌들이 소중하다.
기념사진을 찍자 했더니 갑자기 가디건을 벗고 머리를 풀어 확 넘긴 뒤 모델포즈까지 취해주시는 프로페셔널한 박물관 직원분 ㅎㅎㅎ 깜놀했다.
우리가 올라온 길의 반대쪽에는 작은 식당이 있다. 그나저나 경치가 정말 끝내준다. ㅠㅠ
아내가 한국어와 영문으로 방명록을 써놓고 나왔다. 앞 페이지를 보니 한~참 전에 적힌 방명록이 마지막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멀리서 잠시 멈추고 돌아본 카노사 성의 반대쪽 사면... 뒤늦은 감동이 밀려왔다.
역사 속의 그 카노사 성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ㅎㅎㅎㅎㅎ
저 사진을 찍은 곳 위치를 구글맵 링크로 남겨둔다. https://goo.gl/maps/6VY5F3NK1VZmaAyk9
덤으로, 카노사 성을 오가는 진입로 및 주변 마을은 이번 이탈리아 렌터카 여행으로 다녀본 길 중에서 베스트로 꼽을 정도로 정말 아름답고 정말 멋있었다. 아름다운 이탈리아를 제대로 느끼려면 무조건 렌터카 여행을 해야 된다.
국도를 따라 느릿느릿 볼로냐로 돌아오니 저녁 때가 다 되었다.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털어넣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은 보람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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