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는 원래 계획에는 없던 곳이지만, 준비 과정에서 내가 어디로 동선을 잡든지 중간에 꼭 걸치면서 존재감을 보이는 바람에 끼워넣고 말았다. 덕분에 볼로냐에서 하루를 온 종일 보내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맨 처음 간 곳은 대학 도서관 투어였다. 볼로냐 대학은 오래된 것으로 유명하다. 1088년에 설립되었으니 무려 935년의 역사를 가진, 유럽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알고 있다. 그 유명세 때문인지 대학 도서관 투어가 있다.
홈페이지에서 가끔 투어(무료) 예약을 받는데, 일정이 미리 몇 개월치가 다 떠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갑자기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종종 접속해서 확인해줘야 한다. 즉, 딱 맞춰 일정을 잡기가 쉽지는 않다. 내 경우 3일 전까지만 해도 정보가 없어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혹시나 하고 재접속 해봤더니 신청 버튼이 활성화 되어있는 것을 보고 냅다 클릭했다.
도서관 앞에 와서 기다리는 중... 이탈리아도 유럽의 다른 도시들처럼 도시 곳곳에 대학 건물이 흩어져 있다. 그래서 미국이나 한국과 같은 대학 캠퍼스 느낌은 받을 수 없지만, 거리 전체가 대학생들의 에너지가 넘친다.
우리가 신청한 도서관 투어는 영어로 진행되었고, 도서관 직원으로 보이는 분이 가이드로 나와서 동선을 안내하며 설명을 해주셨다. 이 도서관은 18세기에 볼로냐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후원으로 설립되었고, 대중에게 오픈되었다고 한다. 도서관 입구는 로마에서 2015년에 봤던 안젤리카 도서관을 연상케 한다. 전체적인 구조는 십자가 형태로 건축하는 중세 성당과 비슷한데, 지식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건축이라고 한다.
이 도서관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일찌기 여성들도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네 개의 책상을 여성용으로 할당했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여성할당제인데, 그렇게라도 해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서관을 여성들에게도 오픈했던 모양이다. 지식의 대중화라는 미션에 철저히 촛점을 맞춘 볼로냐 대학의 의지와 선견지명이 반영된 흔적 아닐까 싶다.
투어는 실제로 운영되는 대학 도서관의 다른 방들로 차근차근 이어졌다. 이런 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무슨 기분일까 싶었다. 수백년 된 책들과 현대의 책들이 섞여 있고, 그것을 또한 동일 장소에서 함께 참조할 수 있는 이 공간... 모든 것을 디지털로 저장하고 접속하고 화면으로 읽을 수 있는 시대를 살다가 갑자기 이런 현실 공간에 서있자니,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느낌이 든다.
도서관의 발전 역사 및 그에 인발브(?)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듣고 투어를 마쳤다.
이제 시내 중심지로 이동해본다.
볼로냐의 상징, 두 개의 탑이다.
원래 볼로냐에는 수많은 탑들이 있었다. 귀족 가문마다 자기 가문의 명성을 자랑하기 위해서 마천루(?) 건설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랄까. 다른 지역에도 탑 건설은 유행했지만 유독 볼로냐가 그게 심했다는데, 이는 볼로냐 지역 사람들의 특색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보통은 저 탑에 올라가는 것이 관광객의 바람직한 태도이다. 하지만 여행 후반부에 이르러 만사 다 귀찮은 우리는 이곳의 작은 광장에서 점심이나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것저것 먹고 당을 채웠지만 배는 충분히 차지 않았다. 추가로 비너스의 배꼽이라는 별명이 붙은 만두 같은 음식을 사먹었다.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여행할 때 이걸 반드시 먹어봐야 한다는데, 맛은... 먹을만은 했지만 이런 걸 굳이 맛있다고 사먹을 일인가 싶.....
이어서 볼로냐 성당 앞 광장으로 이동했다.
바지만 입은 듯한 외양의 볼로냐 성당. #상의실종 실제로 아랫 부분만 대리석이 입혀져 있고, 뒷쪽은 그냥 벽돌로 방치되어 있다. 이유는 역시나 시에나 성당처럼 이곳도 로마 교황청의 견제가 들어온 때문이었다. 건물 엑스테리어는 추가 예산이 끊긴채 중단되었고, 그래서 이런 특이한 모습으로 남아있게 됐다. 하지만 이제와서는 그게 되려 명물이 되었으니... #오히려좋아
착시 때문인지 나는 아랫쪽에 대리석을 입히다 만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대리석 위에 초코렛 색깔의 벽돌옷(?)을 입히다 만 것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이 형태가 나는 나름대로 멋있고 마음에 들었는데, 정작 볼로냐에서는 이 공사를 완공시킬 예산을 모으고 있다 하니... 꼭 그래야 할까 의문이다.
광장 앞은 역시 행복한 장소이다. 주위에 꼬맹이들을 배려하는 거리 공연 악사들의 무대 매너가 매력적이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광장 주위의 이모저모. 분수대 뒷편에 있는 격자무늬 빗물 배수로 디자인이 이곳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광장 주변에는 유명한 서점도 있다. 어린이를 위한 책 전문점이다. 볼로냐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도심의 가장 중심지에 어린이 서점이라니... 그 사실이 뭔가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계적으로 '교육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따려면 이 정도는 쳐야(?) 하는 건가 싶다.
성당에도 잠깐 들어가 보았지만 입장 허용 시간도 다 됐고 내부에 딱히 특이한 점도 발견하지 못해서 금방 나왔다.
이제 우리는 볼로냐의 또 다른 볼거리, 해부학 실습실을 보러 간다. 볼로냐 구 도서관 건물에 있다.
이곳의 일부분은 지금도 볼로냐 대학에서 실제로 사용 중이다. 복도 천장에는 이곳을 후원한 수많은 볼로냐 가문의 문양이 박혀있다. 화려한 디자인에 계속 눈길을 빼앗긴다.
해부학 실습실에 가려면 약간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직역하면 '해부학 극장'이라고 되어있다. 그 이유는 아마 과거에는 인체 해부 실험을 주위에서 관람(!)하는 형태로 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생긴 방 하나가 전부다. 중심에 실험대(?)가 놓여있고, 주위에 계단식 의자가 사방으로 놓여있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그 장면...
역사적인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작은 흥분감이 일었다. 주위 조각상과 장식들, 천장 인테리어까지도 인체의 신비와 관련해서 각각 나름대로의 의미가 담겨있다.
해부학 실습실을 나오면 도서관 건물을 한바퀴 돌면서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때 좀 지쳐서 전부 다 보지 않고 나왔다. 그리고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난 공원 벤치에서 간식을 먹으며 좀 쉬었다.
이번엔 볼로냐 시장 골목을 돌아보았다. 그 도시의 중앙시장은 웬만하면 가보는 편이다. 그런데...
역시 이곳도 많이 현대화 되어서, 전통시장이라는 느낌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다.
오래 전부터 비 맞지 않도록 천장이 설치되었다는 중앙시장이다. 내부는 피렌체 때처럼 완전히 리모델링 되어서 현대적인 쇼핑몰과 차별점이 없다. 기대했던 그림(?)이 안 나온다.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며 돌아다녔다. 조금씩 비도 내렸다. 우리는 맥도날드에서 비를 피하며 일단 재정비 했다.
저녁 먹기 전까지 쉬엄쉬엄 시내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구경했다.
특이한 점은, 어딜 가나 서점이 있고, 책과 관련된 행사도 많고, 중고 책방도 많더라는 것이다. 볼로냐는 역시 학문의 도시, 책의 도시였다.
볼로냐를 떠나면서... 과거에 볼로냐 성벽의 주 출입문이었을 Porta Galliera를 무슨 의식을 치르는 기분으로 통과했다. 바로 앞에는 과거의 해자가 유적지처럼 남아있었다.
저녁은 중국 식당에서 완탕면을 먹었다. 오랜만에 뜨끈한 국물이 뱃속에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ㅎㅎㅎ
철길을 건너 숙소로 돌아오는 길. 볼로냐에서의 단 하루. 어제 카노사에 너무 시간을 빼앗겨서 볼로냐 일정이 짧아질 것을 염려했지만 오히려 시간이 많이 남아버린 하루... 정말이지, 뭘 모르면, 볼 것도 없고, 봐도 의미가 없다. 역시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앞으로 살면서 볼로냐에 대해 더 잘 알게될수록, 오늘의 짧은 발걸음이 못내 아쉬워질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쉽지가 않다. 얼른 들어가서 쉬고 싶을 뿐 ㅎㅎㅎㅎㅎ
이제 내일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 아씨시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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