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교리교육의 방법론에 대하여 월간 "교회성장"과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교리교육의 문제점과 해결방안
교회의 역사는 곧 교리의 역사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예수님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첫 번째 교리문답이라면, 그에 대한 각종 오해는 이단들의 대답이 될 것이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인간일 뿐이라고 말했다면 헬라인은 예수님이 인간의 형체를 허깨비처럼 덧입고 강림했던 신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제대로 된 신앙고백(교리) 위에 교회를 세우셨으며, 그 후로 교회는 제대로 된 교리를 지키고 전수하는 일에 책무를 맡은 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 수 십 년간 한국 교회는 마땅히 했어야 할 교리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더욱이 지금은 이단의 공격이 거세졌고 또 세상은 교회와 기독교를 향하여 ‘무개념’이라며 손가락질하는 형편이다. 이에 대해 크리스천으로서 기분이 나쁘지만 마땅히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안타까울 뿐이다. 무(無)교리주의로 자라난 성도들은 무(無)개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교리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더 강조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왜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이다.
필자가 교리교육에서 강조하는 것은 소통과 논리이다. 기존 교리교육의 방식은 중세 로마가톨릭적인 교육이다. 당시 가톨릭 교육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주지 않고, 사제가 가르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성도와 사제의 영역을 나눈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카톨릭 교육의 특징을 답습했다. 교사가 학생들은 볼 수 없는 책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그 내용을 주입식 교리교육을 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 교회에서 교리를 공부한다고 하면 성도들은 어려운 신학 책을 떠올린다. 이때 우리는 생소하고 어려운 용어의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어려운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19세기의 공부 방식으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이러한 모습은 결국 교회의 수적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교회에서 이탈하고 있는 성도들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대부분 30대인 것을 알 수 있다. 이탈하는 30대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가보면 대부분 ‘유원지’가 아닌 보다 잘 가르치는 교회로 간다는 사실이 더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더 이상 주입식 가르침이 팽배한 구역모임과 교회 등에서 이루어지는 질 낮은 교육에 자기 인생을 맡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교회교육의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
필자의 경우,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해 더 많은 독자와 소통하면서, 그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교리교육을 하는 독자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일을 하고 있다. 특히 페이스북을 통해 정말 많은 교리교육의 동역자들을 만났다. 대부분 교리교육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라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대체로 한국 교회는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교회에 나와서 ‘사영리’ 정도의 아주 기초적인 원리를 배우고 나면 그다음에는 무엇일까? 대부분은 ‘이제 구원받았으니 천국에 가면 되는데, 그래서 죽기 전까지 그저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시간 나면 교회 봉사도 좀 하고, 전도도 좀 하고……’ 그렇게 살다가 천국에만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교회 안에서 최대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언제나 만족한 듯 흐뭇한 표정만 짓고 있으면 신앙이 좋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성도들의 삶에 대한 교육은 없다.
그래서 한국 교회 성도들의 1차 목표는 교회에서 우리끼리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살다가 곱게 죽는 것이 돼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교리문답은 삶에 대해 가르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에는 이 같은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전체 교리문답의 66% 즉, 2/3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십계명을 해설하고 있는데 이 십계명은 바로 ‘성도의 삶’에 대해 매우 자세히 그리고 비중 있게 다루는 부분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리문답을 오랜 세월 무시하고 애써 외면한 탓에 이런 내용이 교리문답에 들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이 삶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따로 강의해야 할 정도로 어두운 현실이다.
필자의 경우 교리를 공부할 때 항상 감사와 감격으로 공부를 마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리를 배우고 나면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고작 몇 가지 지식을 배워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타인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교리의 순수한 내용을 배우고 난 후, 그 눈으로 기존 교회를 바라면 잘못된 것이 얼마나 많이 보이는지 모른다. 그러면 잘못된 부분은 고쳐야 한다며 처음에는 화를 내거나 싸운다. 그러나 이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벽에 부딪히게 되면 다음 반응은 도피하여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교회는 정말 이상해!” 하고 말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 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떠돌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봐왔다.
하지만 교리를 배운 사람의 다음 할 일은 이러한 것이 아니다. 먼저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그분의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처음 반응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정확하게 교리교육을 받은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만함과 죄성이 쉽게 그 길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교리를 가르칠 때 바로 이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배우는 자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 이것이 바로 교리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우리가 교리교육에 부정적이고, 등한시하는 이유는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에게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리교육은 인생의 해답을 찾기 위한 첫 번째 실마리를 푸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이상 교리교육을 미룰 이유는 없다. 지금 당장 교리교육을 시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가르치는 방법이다.
① 생각하도록 해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교육 못지않게 교회교육에서도 주입식 교육방법이 주를 이루었다. 교리교재를 펼치면 어려운 설명이 몇 줄 적혀있고, 그 아래에 밑줄이 그어진 빈칸이 있다. 또 빈칸 옆 괄호 안에는 성경구절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괄호 안의 성경구절을 찾아서 답을 적으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각자의 삶에 적용하라는 의미에서 도움말이 적혀있다. 이런 교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겉으로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상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으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교회에서 학생들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질문을 아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까. 이는 포기해서 그렇다. 교사에게 질문을 해서 타당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왜 그렇지?”라고 묻고,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더 이상 교리를 외우게 하지 말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성도를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교육하려면 생각하는 힘을 자꾸 길러주어야 한다. 신앙의 뼈대가 잘 세워질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도 논리적인 교리교육이 필요하다.
② 본문을 잘 살펴본다
논리적이고 즐겁게 교리문답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교리문답 본문을 잘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리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준비하기 위해서 관련 해설서를 산다. 하지만 해설서를 보는 사람은 교육에 바로 적용할 엄두가 나지 않아 이내 좌절하고 만다. 교리문답 본문을 직접 보려고 하지 않고 해설서에 의존하려는 우리의 태도가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본문을 직접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연구한 2차 자료만 보면서 공부하는 것은 바람직한 학습 방법이 아니다. 교리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능한 학자가 쓴 해설서를 읽기만 하면 교리문답을 이해하게 되겠지’라는 생각은 오히려 유능한 학자가 쓴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 교리교육을 위한 가장 좋은 준비는 직접 교리문답의 본문을 관찰하는 것이다.
< 본문을 잘 보는 세 가지 원리 >
숲 보기 | 교리문답 전체를 거시적으로 본다. ① 마인드맵으로 논리 흐름 파악하기 ② 정량적 분석으로 강조점 파악하기 |
나무 보기 |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 쓰며 꼼꼼히 본다. |
문맥 보기 | 교리문답 각각의 질문과 답이 왜 하필이면 그 위치에 있는지 생각한다. |
③ 삶으로 가르친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감추신 뜻’과 ‘나타내는 뜻’ 이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미래를 만드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내다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뜻을 사람에게 감추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친히 감추신 뜻에 속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빙자하며, 우리가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안다고 하거나 알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경우 없는 행동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뜻을 ‘도덕법’이라고 한다. 도덕법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 나타난 것이며, 그것이 율법에 적혀 있고, 그 율법을 다시 압축하고 요약한 것이 십계명이다. 이 십계명을 또 압축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과 같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한 단어로 줄이면 ‘사랑’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구분했다.
율법의 첫째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고 억제하는 것이다. 율법을 통해 가장 먼저 우리는 무엇이 죄인지 알게 된다. 분명히 적혀 있기 때문에 ‘아, 이것은 하면 안 되고 저것은 해도 되는구나’하고 감을 잡게 된다. 또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므로 그 죄를 저지르지 않고자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율법의 두 번째 역할은 죄를 돌이켜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아는데도 실제로 살다 보면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때 사람들은 스스로가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깨닫고 나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 여기까지 나아가게 하는 것이 율법의 기본 기능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강조했던 것은 율법의 세 번째 역할이다. 그것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성도의 삶의 규범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성도가 올바른 가치를 실현하고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그동안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믿음에만 충실했다.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배운 바 없거나 지극히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기독교라고 하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왜 삶의 영역에서는 그토록 이기적이며 도덕심이 바닥인가 하는 것이다. 교리문답의 내용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십계명이다. 즉, 올바른 삶에 관한 것이다. 십계명은 곧 삶이며, 교리가 곧 삶이다.
< 삶으로 접근할 때 주의점 >
복합적으로 적용한다. | 십계명의 윤리를 적용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주제가 각각 하나의 계명에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감사함으로 한다. | 계명을 지키는 삶은 자칫 율법주의나 공로사상으로 흐르기 쉬워서 남을 정죄하는 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계명을 지키는 삶은 먼저 가사가 있어야 한다. |
기본 커리큘럼으로 확정한다. | 사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이 교리이다. 설교와 성경공부에 이미 녹아져 있다. 교리문답을 모든 교회 교육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
무엇을 가르칠까
한편 교리교육에 있어서 ‘무엇을 가르치는가’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교리문답이 만들어진 시기는 소위 ‘평화의 시대’가 아니다. 왜 그럴까? 이단이 창궐하고, 종교 갈등이 있고, 신학적 논쟁이 심화되는 등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고치고 조금 더 바른 신앙을 정립할 필요가 생겼을 때 교리문답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주 좋은 교리문답일수록 문제가 심각하고 싸움이 치열할 때 만들어진다’라는 생각은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교회의 역사는 곧 교리의 역사이다.
사실 제대로 된 교리교육을 받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검증된 커리큘럼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교회가 함께 인정하고 고백하는 전통적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를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제네바 교리교육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대․소교리문답 등의 문서이다.
* 제네바 교리문답(The Catechism of Geneva, 1537-1541)
종교개혁자 칼빈이 직접 만든 제네바 교리문답은 종교개혁을 변호하는 책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출판하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도망 과정에 잠시 들른 제네바에서 만난 기욤 파렐에 의해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신앙의 훌륭한 고백’이라는 짧은 신앙고백서를 만든다. 이로 인해 제네바에서도 쫓겨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며 사역한다. 몇 년 후, 종교개혁의 거센 흐름에 마음을 바꾼 제네바 지역에서 칼빈을 다시 초청하게 된다. 칼빈은 ‘교회와 학교에서 교리문답을 가르친다’는 조건하에 제네바로 돌아가게 되었고, 새로운 구상으로 더욱 철저한 교리문답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373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제네바 교리문답’이다.
*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s Confession, 1560)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존 녹스와 동료들이 스코틀랜드에서 당시 로마 가톨릭의 세력과 투쟁하면서 개혁을 추진할 때 만들어 사용하던 것이다. 영국은 종교개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내용은 그대로 놔둔 채 겉으로만 종교개혁을 했다. 엄밀한 종교개혁을 주장하던 존 녹스는 추방되었는데, 녹스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존 녹스가 마주한 교회는 우상숭배와 부패가 여전했다. 그는 “성전을 정결케 하라”는 유명한 설교를 한다. 이 설교를 듣고 양심을 깨우친 성도들에 의해 진정한 종교개혁이 촉발된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이 문서에는 ‘거짓 교회’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벨기에 신앙고백(The Belgic Confession, 1561)
귀도 드 브레 목사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벨기에의 도르닉 시에서 핍박받는 성도들의 신앙을 위로하고 변호하기 위해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개신교의 교리가 이단적이거나 불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총독에게 알리기 위해 신앙고백서를 총독 관저에 몰래 던져 넣었다가 도망자의 신분이 되었다. 귀도 드 브레 목사는 결국 잡혀서 순교하게 된다. 이 신앙고백서는 우리에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유럽, 특히 네덜란드의 개혁 교회에서 표준 신앙고백 문서로 정착했다.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학문의 중심지였던 하이델베르크는 종교개혁의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자유로운 학문논쟁이 있었던 만큼 다양한 의견으로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 문제 앞에서 도시를 다스리던 프리드리히 3세는 신학적 입장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훌륭한 학자들을 하이델베르크에 모이게 한다. 그들은 팔츠 지방에서 사용할 교회법과 초신자 및 청소년을 교육할 교리문답서를 작성하는 일에 착수한다. 이 교리문답은 프리드리히 3세의 영향권에 속한 모든 학교와 교회에서 청소년들의 의무교육 교재로 사용하고, 장년에게도 설교했다. 특히 이 교리문답을 출판한 즉시 유럽의 여러 나라로 급속히 확산되어 유럽 전역에서 역사상 가장 대중적으로 보급된 교리문답이 되었다.
*도르트 신조(The Canons of Dort, 1619)
종교개혁의 치열했던 시대가 지나고 17세기 초반, 네덜란드의 한 대학에서 칼빈의 엄격한 예정론에 반대하는 학자의 책이 출간되며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에 반박하는 작업을 요청받은 알미니우스는 사실 칼빈주의 예정론에 회의를 품고 있었던 인물로 오히려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문제가 점점 심각하게 번지자 네덜란드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결국 도르드레흐트라는 도시에서 대규모 국제회의를 개최한다. 장기간의 회의 끝에 알미니우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결론이 났으며, 이 회의에서 채택된 내용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 것이 바로 도르트 신조이다.
*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1647, 1648) -신앙고백서, 대․소교리문답, 예배 모범, 정치 모범
한국의 장로교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장로교는 기본적으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신앙과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영국의 종교적 혼란기 속에서 교리와 삶의 영역까지 좀 더 엄밀한 종교개혁을 추구하던 장로교는 계속 수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힘겨운 시절 덕분에 오히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참된 왕이시다’라는 진리를 더욱 굳게 붙잡을 수 있었다. 결국 1643년 7월부터 6년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소집된 종교회의에서 네 종의 표준문서가 나온다. 이 결과물의 핵심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교회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등 예배와 삶에 관한 포괄적인 것이다.
한국 교회에 바라다
교리 공부를 통해 성도들의 영혼을 만져주면 이내 그 눈에 생기가 돌아오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헌신할 것이다. 그러나 교리교육에 대한 목회자와 성도 간의 오해와 생각의 차이는 매우 큰 듯하다. ‘제발 좀 가르쳐 달라!’는 성도들의 생각과 달리 목회자는 ‘성도들이 싫어할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가 대신하여 성도들의 입장을 단언하건데, 성도들은 그것이 교리인지를 몰랐을 뿐 배우고자 하는 갈급함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대체 왜 제대로 안 가르쳐 주는지 항상 궁금해 하고 있다. 필자가 전국을 다니며 강의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왜 이런 걸 이제야 알았을까? 그동안 나는 왜 이렇게 살았지? 교회는 왜 이런 것을 안 가르쳤을까?”이다. 부디 성도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교리교육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편 목회자들조차 교리를 ‘딱딱하고, 감동 없는 지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 상태에서 교리교육을 하는 경우 지식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실제 교리교육을 담당해 본 필자는 강의를 하는 매 순간마다 뜨거운 감격과 감동을 발견한다. 요즘은 성도들에게 교리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정도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건전한 궁금증과 질문이 오가고 그 속에서 우리가 오해하던 하나님의 참모습을 찾게 된다. 배움의 과정 중에 알게 된 하나님을 삶에서 경험하게 된다. 또한 이를 나누는 과정에서 상한 감정의 치유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부디 교리에 대한 오해를 풀고, 교회 안에 교리교육을 도입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루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황희상 작가 / 전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및 고려신학대학원 신학과(M.A.)를 졸업한 황희상은 기독교잡지 『The Voice』 편집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리교육방법론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특강 소요리문답(상, 하)』,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특강 종교개혁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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