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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체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라서 그런지, 그냥 본문만 슬쩍 읽고는 '다 아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요리문답은 '엑기스'입니다. 엑기스를 복용할 때는 성분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드셔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G.I. 윌리엄슨의 소요리문답 해설서를 참고합니다. 척박한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던 좋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차근차근 공부하시다 보면 25과에서 26과로 넘어갈 때 조금 이상한 점이 보입니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2부에 나와야 할 86, 87문답을 여기로 끌어와서 해설합니다. 저자가 이유를 충분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편의상" 그렇게 하겠다고 단원 도입부에 언급한 것을 보면, 적어도 저자가 의도한 것은 분명합니다. 31문과 32문 사이에 86, 87문답을 배치시켜서, 소위 '구원의 서정'으로 앞 뒤 구색을 갖추려 하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저는 이런 변형이 윌리엄슨의 실수라고 봅니다. 심지어 단원 끝부분 연습문제 1번에서 '이렇게 순서를 바꿔야 하는 이유가 무어냐'고 독자에게 확인 질문까지 던집니다. (이 확인문제가 원저자의 책에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판 출판사나 번역자의 작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의도를 추측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요리문답을 설명하다 보니까, 이쯤에서 이제 소위 ‘구원의 서정’을 설명하고 싶었고, 그렇다보니 ‘회심’에 대한 설명을 넣어야 되겠는데, 소요리문답에는 그런 내용이 나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뒤에 86, 87문에 나오는 ‘회개’를 가져다가, 여기서 미리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방법일까요? 저자가 소요리문답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면서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데, 윌리엄슨의 방식대로 한다면 독자는 ‘회심(convert)’과 ‘회개(repentance)’를 혼동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원래 소요리문답은 이 지점에서 회개를 다루지 않습니다. 대요리문답에서도 회개를 효과적인 부르심이나 칭의의 단계에서 설명하지 '않고', 성화와 관련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의로움을 얻는 과정에서 회개를 논리적으로든 시간 순서로든 그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어떤 '돌이키는' 행동을 강조하려는 것은, 본디 소요리문답의 문맥이 의도하는 바가 '아닙니다'. 17세기의 문맥은, 우리가 회개를 통해 구원의 절차나 관문을 통과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중보로 받을 유익을 성령을 통해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소요리문답은 시간 순이든 논리 순이든, ‘구원의 서정’을 설명하지 않고, 효과적인 부르심에서 끝냅니다. 칭의, 양자됨, 성화는 거기서 비롯되는 유익입니다. 단순합니다. 그리고 대요리문답은 회개를 성화의 영역에서 부연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2부에 가서야 나옵니다. 우리는 대소요리문답의 문맥을 면밀히 살핌으로써 이 사실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회개도 그렇고,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서정이라는 후대의 도식에 17세기 소요리문답의 문맥을 맞추려 하는 것은 일종의 월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소요리문답의 원래 문맥이 더욱 은혜로웠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으면, 거기서 이미 상황 종료입니다. 나머지는 다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통해 받는 유익입니다. 칭의도 유익, 회개도 유익, 죽음도 유익... 성령께서 하시는 모든 것은 사나 죽으나 다 유익입니다. 그런데 윌리엄슨은 왜 그렇게 설명했을까요? 어쩌면 소요리문답을 얕잡아 본 탓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저 같으면 원래의 순서를 바꾼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17세기의 작성자들이 '제대로' 작업했을거라고 존중한다면, 저것을 바꾸려 할 때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시도는 아직 우리 시대에는 과분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