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고, 내적 갈등을 말하고, 자아를 묻기 시작하는 듯한 모습을 보며, 일부에서는 또 '기계에 영혼이 생겼다'며 흥분한다. 동시에 그걸 막아야 한다며 비상벨을 누르는 사람들도 더 늘고있다. 특히 태반이 목회자들이다. 하지만 그 정체는 영혼의 탄생 뭐 그런 게 아니라 더더욱 고도화된 신경망의 출력성능 향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따지고보면 원래 컴퓨터공학이 지향하던 오래된 미래가 실현된 것이다. 아서 클라크는 "충분히 발전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이것은 그러니까, 마법이 아니라 그냥 기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정신 활동이 뇌 과학의 영역에서 분석 및 해체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AI를 닮았음이(???) 새록 증명되고 있다. 정확히는, 'AI가 인간의 정신 활동 거의 전부를 통계적으로 모사할 수 있게 되었다'가 맞겠다. 우리가 정신 활동이라 믿었던 것들의 상당 부분은 영혼의 신비가 아니라 '신체적 기제'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 몸과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 신학의 자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는 지금이다. 인간은 무심코 우리 기억과 사고 활동이 '몸'보다는 '영'의 작용이라고 믿어왔다. 신학도 그 영향을 탔다. 하지만 AI의 충분한 발달로, 수천년만에 그 대중적 가설이 시험대에 올라 마취제를 맞은 상황이다.
이런 말을 하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공포가 "그럼 인간도 결국 물질 아니냐"는 질문이고, 곧장 따라붙는 딱지들로, 유물론, 삼분설 등이 떠오른다. 까딱 잘못하면 이단 되기 딱 좋은 위험한 개념정리다. 정신 바짝 차리고 다뤄야 한다.
확실히 하자. 인간을 육체와 혼과 영으로 나누려는 시도는 틀렸다. 워치만 리가 이단이니까 틀려, 라는 식의 답변은 더 큰 문제다. 이는 인간의 고고한 정신활동을 저급한(?) 육체와 나누려는 영지주의적 시도의 흔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을 수 없다. 그걸 인간 내면의 신성한 파편으로 간주하여, 타락의 영향권에서 슬쩍 빼버리려는 태도. 그렇게해서 정신을 육체와 분리하며, 동시에 백옥처럼 순수하게 남아있(기를 바라)는 영혼과도 깔끔히 분리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려다 삼분설이 나왔다.

그럼 이제 답해보자. 인간의 정신 활동이 이 뇌 신경망의 결과라면, 정신은 몸 쪽에 속할까, 영혼 쪽에 속할까. 낡은 과학은 뉴런의 전기적 작용으로 발생한 결과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뇌를 두개골 안에만 가두지 않는다. 감정, 판단, 심지어 신앙적 체험까지도 전신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전인적인 신체 작용이란 것이 현대과학의 중간 결론이다. 그래도 어쨌든 과학은 영과 몸 중에 고르라면 몸의 작용으로 본다. 과학은 애시당초 영은 다룰 수 없는 영역으로 둔다.
AI는 인간과 유사한 정신 활동을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래도 된다'. 그래도 신앙은 무너지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건 기술이 아니라, 영지주의 이후 늘 방어 태세부터 취해온 신학이다. 과학이 신앙을 공격하고 있다는 감각은 사실 오래된 기억의 잔상에 가깝다. 애굽의 술사들, 욥의 친구들, 어부 출신 제자들, 오병이어 앞에서 고개를 저었던 자들, 만져야 믿겠다는 도마, 천동설, 페니실린, 666 베리칩 등...... 도킨스는 기독교의 숙적이라기보다, 자기 이야기를 잘 팔아온 저자에 가깝다. 과학계에서도 권위자는 아니고 좀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 정도. 그런데 오히려 교계에서만 그는 사단의 하수인으로 '격상'된다. 중요한 건 누가 무슨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말에 대해 신학이 어떻게 반론하고 정제해왔느냐다. 그 과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신앙은 오히려 단단해진다. 그런데......
바빙크는 인간이 영혼과 몸의 유기적 통일체라는 전제로 그의 교의학을 풀어간다. 정신 활동이 몸에 매여 있다는 관찰은 전혀 위협이 아니다. 바빙크는 이미 백 년 전부터 몸을 영혼의 도구이자 성전으로 봤다. 뇌과학이 뇌의 경계를 두개골 밖으로 확장하든 말든, 그걸 모방하는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전기와 데이터로 제단에 불을 내려(?) 노래하고 춤추는 신비를 창조하든, 바빙크에게는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신비와 그 창조자이신 주님의 권능이 더더욱 또렷해질 뿐이다.

AI의 지능적 수행을 보고 호들갑 떠는 신학자들을 향해 바빙크는 아마 일반은총부터 다시 공부하라고 했을 거다. 기술은 하나님이 허락한 문화적 소명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발견하여 고도로 구현해낸 일반은총의 산물이다. 그러니 기계가 인간 사고와 감정의 형식을 흉내낸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권이나 영혼의 실질이 훼손되지 않는다. 넓고 풍요로운 개혁신학 관점에서 인간의 영혼은, 그저 신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에덴동산에서 흠없이 작동하는 고차원적 연산 장치 따위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는 존재의 중심이자 정원을 자유롭게 다스릴 책무를 위임받은 청지기이자 동시에 타락할 수조차 있는 의지적 존재였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 작동하는 기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의 문제였다.
그래서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기준도 '기능'이 아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기준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책임성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6째날 만들어진 정교한 지능의 수준이 아니라, 친히 불어넣으신 생기와 언약적 지위, 그리고 그가 받은 소명에 있다. AI가 인간보다 훨씬 능숙히 갈등을 묘사해도, 그 기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책임지지 못하니 영혼을 담거나 책임질 주체가 될 수 없다. 유기적 생명과 기계적 모방의 차이가 아무리 좁아져 보여도, 인간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 당사자'이지만, AI는 인간이 만든 '도구'다. 도구는 그 행위에 대해 영원한 심판이나 보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지금 물어야 할 질문은 AI에게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우리가 정신, 몸, 영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성급하게 이해하고 규정해왔는지에 대한 반성이 먼저이다. 성경에서 영혼은 고급 인지능력이나 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생명을 부여받아 살아 있는 존재 상태를 가리킨다. 정신 활동을 몸에서 분리하고 영혼과 동일시하여 유물론과 결별함으로써 만족하고 마는 안일함은 AI 시대에 당신을 뿌리부터 흔들 것이다. 이걸 풀어야 할 시간에, 뒤에서는 AI로 설교를 다듬으면서, 앞에서는 AI에 놀아난다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책꽂이에는 또박또박 바빙크 개혁교의학이 꽂혀 있는 아이러니. 지적 불성실이자 게으름에 다름 아니다.
기술은 질문을 던질 뿐이다. 불안은 대답하지 못한 신학에서 나온다. 이 불안을 직면하지 않는 한, 다음 세대는 AI보다 교회를 더 낯설어할 가능성이 크다. 신학의 체력을 기르자. 이원론의 감빵문을 열고 나와서, AI 시대에 성경적 전인론이 무엇인지 규명해달라. 참 많은 이들이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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