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크롬과 MS의 새 엣지 브라우저를 병행 테스트 중이다. 며칠 더 써봐야 되겠지만, 일단은 속도와 편의성 면에서 MS 압승이다. 특히 탭을 많이 열거나, 확장프로그램을 많이 깔수록, 새로운 엣지의 성능은 빛을 발한다. 넷플릭스에서 4K 영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1997년 넷스케이프부터 지금까지 온갖 브라우저를 다 써봤지만 지난 10년은 내리 크롬만 썼다. 최근에는 온 세상이 크롬으로 대동단결하는 분위기라서 결국 구글의 승리인가 싶었는데.. 살다 보니 또다시 이런 날이 온다. 설치 과정에서 '구글 크롬의 설정 가져오기' 버튼을 한 번 클릭하는 것만으로 내가 쓰던 크롬과 거의 완벽히 똑같은 상태가 되는 걸 보며, 10년 전 크롬이 익스플로러의 즐겨찾기를 쏘옥 뽑아가던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폭소가 나왔다. (언제 심심할 때 애플, MS, 구글이 각각 어떤 유니버스를 구상하고 있으며, 어떤 영역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지에 대한 글을 써봐야겠다. ㅎㅎ)
특별히 내가 충격 받은 것은, MS가 새 엣지를 만들면서 '크롬'을 기반으로 코드를 짰다는 사실이다. 응? MS가 구글의 크롬을 채택했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구글과 무관하게 '크로뮴 기반으로 독자 개발'한 것이지만 어쨌든 상징성이라는 게 있는데 그런 엄청난 변화 - 기술보다는 정치적 선택 측면에서 - 를 해내다니... MS 정도 규모의 기업이 그런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라는 사실이 정말 놀랍다. 애플도 구글도 아마존도 모두가 자신만의 생태계를 만들려고 정신이 없는 이 마당에, MS는 어쩌면 자사의 핵심영역이자 회사의 자존심이라 할 부분을 과감히 버리고 전혀 다른 게임의 룰을 쓰는 셈.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MS가 스스로의 '적폐'를 청산하고, 애플과 구글 양쪽 모두의 생태계에 자기 자신을 오픈 해버렸다랄까.
이러면 누가 승자가 될까. 윈-윈 아닐까.
MS가 원래부터 대단한 기업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혁신'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다.
p/s.
브라우저 이야기를 쓰면서 과거를 회상해보니 요즘 2-30대에 비하면 내가 얼마나 옛날 사람인지를 새삼 느낀다. 내가 대학 입학했을 때만 해도 인터넷이란 게 없었다. 응? 진짜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 바로 얼마 전이라니까. 아 물론 그때도 있긴 있었는데 그걸 현실 속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은 만 명에 한 명 꼴이었다. 이게 고작(?) 25년 전이다.
전산실에 컴퓨터가 30대 있으면, 거기에 무슨 파일을 복사하려고 하면 디스켓을 30번 넣었다뺐다 해야 됐다. 어쩌다 외국에서 온 메일을 한글로 읽기 위해서는 따로 유도라(eudora)인지 뭔지 하는 것을 깔고 뭐 어쩌고 해서 - 이젠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나네 - 봐야 했고, 그나마도 인코딩이 안 맞고 해서 안될 때가 많았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랑 카톡으로 소통하고 읽씹하면 짜증나고 그러는 지금은 이해가 안 되지만 그땐 이메일 하나 성공적으로 주고받으면 그날 하루가 뿌듯하고 막 그랬다고. 피씨통신에서 인터넷 메뉴에 접속한 뒤에 따로 돈을 내고 "WWW(월드 와이드 웹)"에 접속하는 날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날 밤에 일기 썼다니까. 그로부터 2년쯤 지난 뒤에도 홈페이지 하나를 만들려면 국내엔 없고 무려 '미쿡' 업체에 딸라돈을 내고 10메가 20메가씩 호스팅을 받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듣기엔 무슨 세상 이야긴가 싶을 소리다. 덕분에 그땐 교수님들 방으로 찾아다니며 "이메일이란 무엇인가?", "오늘은 첨부파일 다운받는 방법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뭐 이런 개인강습 해드리고 용돈 걱정 없이 살던 시절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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