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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는지, 총회에 사용된 재정을 통해 상상해본 글을 페북에 올린 적이 있고, 그것을 각색하여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에도 부록처럼 넣었다. 오늘은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의 작성 과정이 어떠했는지 적어본다. 교리문답 작성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혹자가 상상하듯이, 그저 기존에 있던 교리문답 몇 개를 탁상머리에 모여앉아 짜깁기로 해치운 것이 아니다.

우선, 전체 총회의 후반기에 해당하는 기간에 교리문답 위원회가 구성되다 보니, 이미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던 "신앙고백서"와 신학적 표현을 일치시키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기존에 있던 교리문답을 조금 수정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교리문답 작성 위원들은, 위원장을 맡았던 팔머의 교리문답을 기본 베이스로 하면 될거라 생각했겠으나, 실제로는 새로 만들어진 고백서의 문구를 고려해야 해서 완전히 새롭게 작업을 해야 했다. 내 생각에도, 고백서가 있어서 더 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힘들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이슈는, 당시 팔머의 교리문답이 취하는 방식에 다른 위원들이 동의하느냐의 문제였다. 팔머의 교리문답은 제네바 교리문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질문 안에 예상 대답이 포함되어 있고, 이를 세분화하여 Yes, No로 답하게 하는 방식이었는데, 그게 너무 길고 복잡하다 하여 위원회 내부에서 반론이 만만찮았다. 그래서 실제로 완성된 교리문답은 그런 것이 삭제되고, 대신에 질문을 구성하는 문장에서 상당 구절을 다시 반복(복창)하면서 대답하는 현재의 방식이 선택되었다. 그 과정에서 진통이 없었을리 없다. 웃셔의 책을 참조하기로 했고, 터크니가 큰 역할을 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팔머가 위원장인 상황에서 만약 그가 자신의 뜻만 내세웠다면 판이 깨졌을 수도 있다.

더구나, 위원회는 작업 도중에 크게 두 번의 흔들림을 경험한다.

첫째는 교리문답을 두 개로 나누기로 결정한 사건이다. '하나님의 법'에 대해 교리문답에 그 풍성한 내용을 담고 싶었던 작성자들은, 곧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는데, 자꾸만 어린이와 초신자가 보기에는 너무 길고 복잡한 교리문답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그들은 결국 두 개의 교리문답을 각각 따로 만들기로 결정하는데, 문제는 또 있었다. 그것은 한정된 인원으로 두 개의 요리문답을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대교리문답을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이를 요약해서 소교리문답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우선 대교리문답 팀을 짜서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대교리문답이 마감될 즈음에 소교리문답 팀을 짜려고 했는데, 문제는 대교리문답을 하는 동안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된 탓에, 조직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알렉산더 핸더슨이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몇몇 위원들도 피치못할 사정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면서, 새로운 멤버로 다시 팀을 짜야 했다. 이것은 어쩌면 위험한 선택이지만, 또한 피치 못할 선택이기도 했다.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이 큰 틀에서 일치를 보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많은 부분에 약간의 어색한 불균형이 보이는 것은 어쩌면 이런 어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러더포드나 특히 길레스피가 끝까지 제 역할을 해준 덕에 명백한 오류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조용히 생각해볼 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 모든 과정을 지키고 인도하셨다는 확신이 든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모여서 할 때마다 얼마나 쉽고 신속하게 '개판'이 되곤 하는지를 경험적으로 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위원들은 그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진지하고 성실하게 이 방대한 작업을 꾸역꾸역 해 나갔던 것이다. 질병과 전염병에 매우 취약했던 당시 대도시의 형편상, 평균 연령이 고작 26세에 불과했던 당시의 런던에서, 5~6년이라는 긴 시간을 스트레스와 함께 고된 작업에 헌신했던 교리문답 작성 위원들께, 나는 그저 감사한 마음이 치밀어 오를 뿐이다. 실제로 총회가 끝난 뒤 몇 해 지나지 않아, 30대 초반에 불과했던 길레스피를 포함하여 상당수의 총대들이, 하나님 곁으로 갔다.

 

※ 자세한 내용은 <특강 종교개혁사> 챕터 1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