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에 서울 '담장너머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지에 기고했던 글인데, 이곳에도 일부 수정해서 올려둡니다.
[독서법]
나는 대학을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들어가서 보니 이 학과는 - 표현이 좀 그렇지만 - "학문"이라는 게 딱히 없는 실용학과였다. 이름은 신문방송'학'이었지만 고유학문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 사회학이나 철학, 윤리학에서 빌려온 개념으로 재구성한 커리들로 채워져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이나 저널리즘 등의 현상 이론 및 사진/영상이나 보도 기술로 채워진 과목들은 유용하긴 했으나,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 나에게 어떤 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과 기초를 충분히 그리고 탄탄하게 채워주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학과였던 듯하다. (물론 나중에 취직할 때는 좋다. 어느 곳이든 면접 때 신방과 나왔다고 하면 일단 호감도가 +10 올라간다.)
고육지책으로 내가 택한 방식은, '타 과 학생들은 그럼 뭘 배우는지'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한된 인생에 모든 공부를 다 할 수는 없는 법이라, 나는 다양한 학과의 1학년 1학기에 공부하는 "개론서"들을 빌려다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즉, 역사, 철학, 지리, 천문, 심리, 정치, 외교, 경제 등 각 분야의 가장 기본적인 도서들을 딱 1권씩만 잡고 읽으면서, 해당 학과의 학생들하고 기초적인 대화는 가능한 수준으로 스키마를 쌓았다. 그 결과, 나는 전문적인 지식은 거의 없으면서 이런 저런 분야에 대해 참견은 가능한, 헛똑똑이는 될 수 있었다.
책을 읽어나감으로써 지식을 섭취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갈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하다가 자기에게 맞는 분야를 찾아서 그 지식을 더욱 가다듬는 방식. 또 하나는 먼저 나에게 맞는 - 혹은 내가 집중할 당위성을 확보한 - 분야를 하나 정한 뒤 적어도 그 분야에 대해서는 덕후 소리를 들을 때까지 깊게 파고, 그렇게 한 분야에서 어느 '경지'에 도달한 뒤에 다른 분야에 눈길을 돌려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방식이다.
양자는 어느 하나가 옳고 그르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각 장점이 분명하고 단점 또한 확실하다. 내가 대학 시절에 택했던 방식은 전자였던 것인데, 장점은 실패한 인생(그런 게 있다면)이 될 확률이 적다는 것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면서 지식을 쌓기 때문에 사람이 외골수가 되거나 친구가 부족해지는(?) 일은 없다. 단점은, 뭐 하나 특출나게 잘 하는 것이 없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부족하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책을 본다 해도 세상 모든 분야를 다 잘 알 수는 없다. 수박 겉핥기가 된다는 뜻. 반면에 어느 한 분야를 먼저 정해서 파는 경우는 그 분야에 전문성을 생각보다 금방 확보할 수 있지만, 엉뚱한 걸 골랐다가 이게 아니구나 싶을 때 되돌아오기에는 너무 많은 자원(시간과 돈, 노력 등)을 써버린 뒤다. 다만 제대로만 먹히면, 소위, '뉴스에 나오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대학 때 전자를 택했다가, 그 한계를 절실히 깨닫고 뒤늦게 역사와 신학 분야에서 후자를 택했다. 처음에 두루 넓게 보다보니 무엇이 더 '가치로운' 것인지 분별하는 눈은 조금씩 생겼던 듯하고, 그래서 내 인생을 어디에 집중해볼까 찾는 과정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감사하게도 여러 기회들을 통해, 결과적으로 종교개혁과 엄밀한 개혁신학이 가진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특별히 그 중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과정과 결실에서 크나큰 매력을 느끼고 내가 가진 자원을 집중해서 그것과 관련된 콘텐츠를 읽어 나가는 방식으로 독서의 패턴을 바꾸었던 것은 돌이켜보면 대단히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분야를 정하는 힘은 '넓은 독서'에서 나오고, 그 분야에서 유의미한 지식을 갖추는 힘은 '집중 독서'에서 나온다. 내가 경험한 이 방식이 정답도 아니고, 사람마다 맞고 안 맞고가 다 다르겠지만, 이런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소소하게나마 '힌트'는 되지 않을까 싶다.
- 특강 소요리문답, 특강 종교개혁사 저자 황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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