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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에 자네에게 최근 일어난 일은 주님께서 무엇을 행하라고 하시는 것보다 세상의 질서에만 맞추려고 하는 악독한 자들이 일으킨 것 같네. 하지만 내가 부탁하는 것은 스스로의 입장에서 자네의 교회 운영방식에 비난받을 만한 것이 혹시 있는지 숙고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네. 자네가 주님의 눈앞에서 겸손해지는 방식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그리하여 주님이 정하신 자들의 구원을 돕고, 그러한 구원이 점점 더 늘어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자네에게 풍성한 은혜와 재능을 주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번 사건을 이용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나."

 

배경지식 없이 이 편지글을 읽은 사람은, 어느 경건한 신앙의 선배가 미성숙한 사역으로 교회에 어려움을 초래한 후배 사역자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하는 것처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칼뱅의 무명시절 친구이자 종교개혁 초창기의 동료였던 '루이 뒤 틸레'라는 사람이 배신을 때리고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되돌아가서는 칼뱅을 회유하기 위해 보내온 편지의 일부이다. 그는 칼뱅이 제네바의 첫 사역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기회로 삼아, 애초에 제네바에서의 사역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단순히 어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지 않았냐고 말하면서, '진짜 교회'인 로마 가톨릭으로 다시 돌아오라며 칼뱅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틸레가 누구인가. 제네바에서 칼뱅을 파렐과 만나게 했던 장본인이자, 칼뱅이 파렐의 추상같은 호통에 두려워하며 제네바 사역을 수락하던 바로 그날 밤의 현장에 함께 있으면서 칼뱅의 고뇌와 선택을 다 봤던 사람이다. 그렇게 알고 저 편지를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낀다.

 

참으로 진정한 동지가 누구인지는 어려움 앞에 섰을 때 드러난다. 세월이 좋을 때는 함께 비바람을 헤쳐나가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 그 진심은 울컥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 틸레는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칼뱅이 어려울 때 후원금을 보내겠다고 편지를 한다. 물론 칼뱅은 그것 역시 본심은 아니라고 판단, 이를 거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