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에 좋아하던 시 10개를 모아봤다.
사 랑 1
김남주
사랑은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사랑은
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하나만의 구속
박광임 (*우리 어머니)
당신은 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그리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사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하나만의 구속이 모든 것의 해방인 것을
알으십니까?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만나면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만나고야 마는 우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신께 제가 드리는 더 없는 진실한 마음
당신이 제게 주시는 눈물나도록 순수한 마음
그것들의 교통과 그 속에서 흘러 넘치는 대화가
끊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초혼
김소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그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멀구나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화살과 노래
롱펠로우
하늘을 향해 나는 활을 당겼다.
화살은 땅에 떨어졌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도 빨리 날아가버려
눈으로는 그 화살을 따를 수 없었다.
하늘을 향해 나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땅에 떨어졌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눈길이 제 아무리 예리하고 강하다 한들
날아가는 노래를 그 누가 볼 수 있으랴.
오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 느티나무에서
나는 보았다. 아직 꺽이지 않은채 박혀있는 화살을;
그리고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친구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그 날이 오면
심 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품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매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서 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 늘
박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바 위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회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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