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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경제론 독후감

category 위즈덤 프로젝트/ETC 2025. 4. 21. 19:22

 

타임머신은 실존했다. 대중경제론. 1980년대 중후반, 한국 경제가 수출 주도 성장과 대기업 중심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권위주의적 시대에 이 책은 쓰여졌다. 당시 야당 정치인이자 민주화 운동가로서 혹독한 시기를 보내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시한 경제 비전이다. 이 책은 당시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 10년 뒤 IMF를 때려맞은 뒤 비판론이 본격 대두되기 이전에 -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대해서도 놀라울 정도의 예측과 통찰도 담고 있었다.

책을 읽다 보면 김대중은 분명 타임머신을 탔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주류 경제 담론이 아니었던 '균형 발전', '소득 분배 정의', '중소기업 육성', '경제 민주화', '지역 균등 발전', '인간 중심의 경제'와 같은 개념들이 책 전반에 흐르고 있다. 대기업 위주의 관치경제 성장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 즉 경제력 집중으로 인한 불균형과 사회적 갈등을 경고했고, 소수의 재벌이 아닌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 향상이 진정한 경제 발전이라고 적어두었다.

거시적으로는,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어떤 위상을 가져야 하며, 어떻게 치열한 국제경제의 무대 속에서 생존하고 발전해야 하는지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단순히 상품을 수출하는 나라를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기여하고, 평화와 협력을 통해 국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지극히 21세기적 주장이어서 놀라움과 울림을 준다. 특히 한반도 평화와 경제 발전을 연계하려는 그의 구상은, 훗날 '햇볕정책'으로 이어진 것을 알기에 감동이 있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다. 팬데믹 이후의 경제 구조 변화,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 기후 변화와 기술 혁신이 가져오는 사회적 변화, 그리고 약육강생으로 치닫는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이 깊다.

이런 시점에서 새삼스럽게도 대중경제론이 우리에게 중요한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첫 문단부터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외형적인 성장 지표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 성장의 혜택이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함께 잘 사는 경제를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기술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가치와 철학이 필요한가', '글로벌 경쟁 시대에 우리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여전히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개정판 서문 중 이런 내용이 있다. "내가 시대를 13년이나 앞서는 선견지명이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13년의 세월을 허송했음을 통탄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 그 뒤로 다시 30년... 대한민국은 여전히 동일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다.

경제에 관심 있는 분이든, 아니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분이든, 대중경제론 일독을 권한다. 초판이든 개정판이든, 아직 중고시장에 더러 있다. 진정한 자유시장경제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완전한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그의 40년 전 호소가, 관세 협정을 준비하는 내란 대행 정부를 지켜보는 지금 내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