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함께 공부하는 모임에서 봄맞이 MT를 떠났다. 이번 목적지는, 내가 국내 여행지 중에서 단연 "최고의 장소"로 치는 안동 병산서원을 택했다. 사적 제260호. 내가 이곳을 최고의 국내 여행지로 좋아하는 이유를 먼저 아래 박스 속에 기록해본다. 오래 전 2001년도에 썼던 글을 조금 수정했다.
병산서원은 안동 하회마을 근처에 있다. 34번 국도를 달리다가 지방도로 진입하면 본격적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널따란 풍산 들판 너머로 하회마을 진입로가 있는데, 그 전에 왼쪽으로 꺾어서 비포장 자갈길로 아슬아슬 고갯길을 넘어가야 병산서원에 닿는다. 유홍준 교수가 그의 책에서 말한 '걸어서 들어가는 병산서원 진입로'의 정취까지는 모르겠으나, 차를 타고 가더라도 '그야말로 그림처럼' 펼쳐지는 멋진 풍경과 아리아리한 자연의 빛깔은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요즘 세상에 무슨 비포장이냐 하겠지만, 병산서원을 보존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가 바로 이 비포장도로다!
나는 병산서원에 자주 간다. 4계절마다 추억이 있다. 병산서원에 도착하면 대충 주차를 해놓고 닥치는 대로 서원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만지고 느끼고 즐긴다. 머슴뒷간, 만대루가 가장 먼저 눈 안에 들어온다. 그리고 외삼문, 동재, 서재, 내삼문, 강당, 존덕사, 사당 등에 발이 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즐거운 인상으로 남는 것은 만대루... 내가 본 절집 중에 봉정사가 가장 인상 깊다면, 병산서원 만대루는 내가 경험한 그 어떤 건축문화재보다도 더 인상깊다. 미리 말하지만, 나 따위의 글재주로는 만대루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누군가는 대충 다음과 같이 썼다. "만대루는 주변 경관을 시원하게 끌어안아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의 마술을 보는 듯 하다. 이것이 인공적인 건축물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나는 만대루의 기둥에 기대섰다가 앉았다가, 급기야 애들처럼 눕고 뒹굴기까지 했으니, 만대루는 원래 "마루"이기 때문이다. ㅋㅋ
만대루에 오르는 통나무계단의 윗트, 만대루에서 앞쪽으로 보이는 강과 병풍처럼 가로막은 병산의 자태, 해가 넘어간 뒤에는 진한 청자빛 컬러로 물들어가는 하늘, 그리고 그것들 모두를 배경으로 삼아 유유히 날아가는 까치 한 마리... '한 폭의 수묵담채화'는 언제 가도 그대로다. 서원 마당, 담장과 안뜰의 정겨움, 저녁노을, 새 소리, 풀바람소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병산서원만의 정취는 그 가운데 서있는 한 인간을 느릿한 카타르시스에 빠지게 하기 충분하다.
만대루에 앉아 수백 년 된 목재를 만지며, 맡으며, 느끼며, 이 구석 저 구석을 캠코더로 촬영하듯 바라보는 내 표정은, 어느덧 어미 품에서 기분 좋게 잠든 강아지의 그것마냥 한없이 흐뭇하게 풀어진다. 이곳에 오르면 시간이 정지한듯 흐른다. 문득 바닥이 조금 춥다 싶어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하늘에 이른 별이 뜨곤 한다. 어쩌면 나는 그 순간 대자연과 일체된 옛 건축물의 향기에 담뿍 취해버렸던가 보다.
이곳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자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이다. 관광객과 구분되어 유달리 분주히 움직이며 마당도 쓸고 하는 분이 보일텐데, 바로 서원 관리인 류시석 아저씨다. 이분은 옛날 서원에서 학생들의 밥을 지어주던 건물인 서원 옆의 별관에서 민박을 운영하며 날마다 서원 관리를 당신 집 가꾸듯 하시는 분인데, 인사를 드리고 알은 척을 하면 시선을 피하며 쑥스럽게 웃으실 것이다. 내가 그분을 처음 뵈었던 날도 그랬다.
"저기... 제가 유홍준 교수의 책을 보고 답사를 왔는데, 아저씨께서 이 책에 나온 그분 맞으시지요?"
"아, 그 책에... 제 이야기가... 쬐끔... 쬐끔 나왔지요. 허허..."
아저씨에게 병산서원에 대해 설명을 잠시 듣고, 이 좋은 곳에서 1박을 해보고 싶은데 가능하겠는지 여쭈었더니, 이렇게 공부를 하러 오시는 분께는 특별히 1박을 제공하겠다며 웃음지어 보이셨다. 그런데 그때는 보일러가 설치된 방이 없고(11월 말이었다!) 구들장에 장작을 때야 하는 방뿐이라며, 여러 가지로 불편한데 그래도 좋다면... 하신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온돌이 두꺼우니 미리 불을 지펴야겠다고, 장작을 챙기러 바삐 사라지셨다.
이곳에서는 할 일이 없다. 말 그대로 할 일이 없으니, 한적히 밖으로 나가 강변을 거닐어보시라. ^^ 해가 지는 어스름에, 강변의 정취 또한 이승(?)의 것이 아니다. 저 밑에 하회마을을 감싸고 도는 바로 그 강의 상류 모래사장이 이곳에 넓게 펼쳐져 있다. 강 건너에 병풍처럼 바짝 다가서서 버티고 서있는 산이 병산이다. 지형적 특성상 굽이쳐 돌아가는 강의 바깥쪽이다. 침식작용에 의해서 깎아지른듯 솟아있는 병산의 그림자가 강물에 파스라이 비친다. 강변에서 뭐라 소리를 치거나 말을 하면 메아리가 선명하게 돌아온다. 이름 모를 새소리가 메아리와 함께 들려오는 그 곳에서 아이처럼 깍깍 대며 한참동안 메아리를 불러내보시라. 저녁식사는 민박에 가서 '헛제삿밥'이라는 것을 드시면 된다. 식탁엔 방금 꺾은 들꽃 한 가지가 곱게 꽂힌 화병이 놓여있곤 할 터이다.
말만 잘 하면, 서원 별관, 전통 한옥집의 문간방에서 잘 수 있다. 만약 더 예쁘게 군다면, 아예 병산서원 동재 건물에서 잘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봤다!) 겨울엔 소쩍새 울음을 들으며(소쩍새가 매일 우는 것은 아니지만!) 별하늘을 지붕삼아 부뚜막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면서 쭈그려앉아 흙바닥의 정취도 느낄 수 있다. 쏟아지듯 눈 안으로 달려드는 우주를 바라보며 행복한 여유를 만끽해보시라. 보석같은 빛을 뿌리는 달과 별이 너무 일찍 기동함이 아쉬울 것이다. 눈썹같이 가는 초생달이 뜰지도, 휘엉청 밝은 온달이 뜰지도 모르겠다. 달이 없으면 또 어떤가. 구름만 없다면 그 날은 여러분이 '은하수'를 보는 날이다...!
올 가을엔 병산서원에서의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보시길 권한다. 바쁘시면 겨울도 좋다. 아침에 방문을 열면 깨끗하고 찬 공기와 함께 병산의 정경이 온통 눈을 후비고 들어올 것이다. 강변에 피어올라 아직 마르지 않은 새벽 물안개를 보면, 피식 웃음이 절로 날 것이다. 나는 누군가, 여긴 또 어딘가... 인생 뭐 있나? ㅎㅎㅎ 아침 일찍 만대루에 한 번 더 올라 심호흡을 하시고, 온 길을 되짚어 돌아오시라. 그 비포장 병산서원 진입로가, 뜨는 해를 맞이하며 찬란히 그대로 빛나고 있을 것이다. ^^
오후에 출발해서, 부지런히 밟아 해가 지기 직전에 도착했다.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관리인 아저씨는 서원 출입문을 딱 잠가버리신다. 늦게 온 다른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는데도, 멀리서 왔다며 잠깐만 들어가자고 아무리 소리쳐도, 늦게 온 유생은 할 말이 없다며 안 끌러주신다. ^^;; 미리 전화 드리기를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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