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치는 이제 충분히 다룬 것 같지만, 아까운 사진들이 있고, 또 인상깊은 골목 하나를 지나가게 되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포스팅을 하나 더 하고 마치려 한다.
노리치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는 동안 매일 아침 조식을 이 집의 식당에서 먹었다. 식사는 모든 것이 오가닉이었고, 집 주인은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신경을 많이 써 주셨다. 하지만 솔직히 타인의 집에 머무는 방식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냥 일반 호텔이 편하다. 나에겐 Travelodge 수준이 딱 맞는 듯하다.
첫 번째 목적지는 위 지도에 표시된 1번 지점. 지도의 바로 아래쪽에 "더 제임스 스튜어트 가든"이라는 프라이빗 공원이 있는데, 이 근처 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이곳 위치는 아래와 같다. 구글에서 보면 이곳이 과거에 성벽의 일부 지점임을 눈치챌 수 있다.
바로 이 다리를 건너면 도로 건너편에 아래와 같이 생긴 집이 보인다.
교회사 책에 롤라드파 이단으로 알려진 교회의 분파가 있는데, 그들이 이곳에서 처형 당했다고 한다. 권현익 선교사님의 연구("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세움북스)에 따르면 롤라드인들은 월터 롤라드라는 발도인 목사로부터 시작되었고 위클리프가 그의 가르침을 따른다. 그러므로 롤라드인들은 오히려 로마 가톨릭에 억압당한 희생자일 뿐, 이단이라는 칭호는 오명을 씌우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결론을 신뢰한다.
롤라드는 위클리프보다 훨씬 이전에 활동하다가 독일의 쾰른에서 화형당한 개혁자이고, 롤라드인들은 그 사상을 따르며 지켜가던 신앙적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날 적은 아내의 일기 중 일부를 아래에 인용한다.
롤라드파를 이단으로 몰아서 처형했던 장소에 그 이름을 그대로 딴 펍이 운영되고있다. 펍의 간판에는 화형당하는 사람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펍 건물 벽에 붙어있는 안내판에는 '이단과 범죄자들을 처형했던 장소'라고만 적혀 있었다. 롤라드파가 종교개혁자들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그저 이단이라는 이름에 묶여 있는 것이다.
비숍게이트는 노리치대성당에서 웬섬리버까지 쭉 이어진 대로 중 하나이다. 그 사이에 그레이트 호스피탈이 세워져있다. 로마 가톨릭 성당에서 세운 병원인데 헨리 8세의 종교개혁 때 몰수/파괴 당하지 않았고, 에드워드6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여기는 건들지 말라고 해서 지금까지도 그 형태가 잘 보존된 채 유지되고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두왕국 이론이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혼선을 빚으면서 집사 직분의 역할, 정부의 역할이 중첩되면서 기존에 교회가 담당하던 사회보장 시스템이 무너져 사회적 혼란이 가중된 면이 없지 않다. 대륙과 달리, 영국 국교회 시스템은 이런 혼란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위정자 입장에서 구교와 신교의 장점만 채택한, 인간적인 생각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비숍게이트를 둘러 보았다.
부연설명 하자면,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빙자해서 수도원 재산을 동결하고 압류했던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세력을 단숨에 꺾고 억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전격적인 조치는 거시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대체로 잘 된 일이었으나, 미시적으로 보면 수도원의 기능이 갑자기 중단되면서 사회적인 혼란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노리치는 잔잔한 매력이 있는 도시이다. 중세의 흔적이 아주 많이 남아있고 그것을 또한 적극 활용하고 있는 자신감이 있는 도시이다. 또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종교개혁의 흔적들까지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종교개혁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다양하다. 노리치는 또한 독립파였던 브라운파가 회중교회를 세운 첫 도시이기도 하다. 브라운파는 자기들끼리 잘 해보려고 독립교회를 세워 떨어져 나갔지만 종국엔 실패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때 독립파의 주장이 세력을 얻자, 대륙의 개혁교회들은 브라운파의 선례를 들면서 장로회파를 서포트 하기도 했었다.
브라운파가 자신들의 도시를 이곳 노리치에서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여기서 또 아내의 일기를 인용해본다.
노리치는 상업이 번성했던 중세도시이자, 독립파였던 로버트 브라운이 회중교회를 세운 도시이기도 하고, 여성 국회의원을 최초로 배출하기도 한 진보적인 곳이기도 하다. 성당이나 도시 곳곳에 여성의 역사가 기록된, 아주 희귀한 도시다. 전통과 보수적 권위보다는 실리와 합리성에 일찍 눈을 떴던 도시로 보인다. 브라운파는 이런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미국 땅을 밟아보면서 왜 미국에서 장로교회가 뿌리내리기 어려웠는지를 납득하고, 노리치에 와서는 회중교회자들의 생각에 심정적으로 납득이 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여기서 성공했다 하는 것을 가지고 자신감을 얻어서 보편적으로 적용할 때, 어떤 반발/어려움들이 있는지, 종교개혁 당시의 혼란상이 어땠을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유연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여행을 통해 배워간다.
노리치 구도심 사진 몇 장을 더 얹어본다.
▼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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