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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앞의 글을 쓰기 전에 이 설명을 먼저 해야 했다.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잠시, 이 도시에 얽힌 역사의 드라마를 알아보자. 낭트 칙령 이후 신교도들의 도피성이 된 라 로셸은 오래 전부터 시민 의식이 높은 도시였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자체 선거를 통해 매년 시장을 뽑았던 만큼, 실리적이고 자유로운 도시로 운영되었다. 르네상스와 개신교 사상을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리적 사상적 토양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자유'보다 소중한 가치가 또 있을까. 도시의 번성과 함께 주변 나바르왕국이나 스위스, 영국 등 신교도가 강세인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가 이어졌으며, 낭트 칙령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신교도의 자유도시가 되었으니, 라 로셸은 왕조차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아버지 앙리 4세의 죽음 이후,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치의 섭정에서 벗어난 가톨릭 신자 루이 13세가 왕권을 강화해야 할 상황에서, 막 재상이 된 리슐리외 추기경의 노련함과 추진력이 시너지를 발휘한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라 로셸에서 멀지 않은 뤼송(Lucon) 주교로 일하던 시절부터 라 로셸이 어떤 힘을 가진 도시인지 훤히 꿰고 있었다. 루이 13세의 욕망과 리슐리외 추기경의 종교적 신념이 콜라보를 이루어, 프랑스 신교도들은 무시무시한 핍박을 받는다. 그리고 핍박의 칼날은 결국, 모든 위그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라 로셸을 향한다.

이 전쟁은 단순한 국지전 혹은 내전이 되리라 여겼으나, 곧 국제전쟁의 양상으로 흐르고 만다. 리슐리외는 프랑스 정예병력을 진두지휘하여 라 로셸을 육지쪽에서 완벽히 포위한다. 그런데 라 로셸은 항구 도시였고, 프랑스는 해군이 빈약했다. 그래서 꼼꼼한 리슐리외는 이미 수년 전부터 영국의 찰스1세에게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지참금을 두둑히 주고, 훗날 라 로셸을 공격할 때 바다쪽을 맡아달라고 밀약을 걸어두었다. (개신교 국가의 찰스 1세가 국내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국가의 공주와 결혼을 강행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라 로셸을 공격하러 가는 척 함대를 준비했지만, 리슐리외 못지 않게 야비한 찰스1세는 실제로는 리슐리외의 뒷통수를 치려고 했다. 국내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찰스1세는 같은 개신교도를 공격하는 행동이 자신의 정권에 위협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프랑스 군을 치고, 라로셸을 구원하러 출병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하지만 또 그 정보가 리슐리외에게 진즉에 새버렸고, 프랑스군은 바다에 방파제를 건설하고 영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다 라 로셸 앞바다에서 벌어진 일이다.

 

위 지도에서, 라 로셸은 물샐 틈 없이 포위된 상태이다. 항구는 남쪽으로 단 하나의 입구를 가진다. 해안은 갯벌이 넓게 발달해서 정기적으로 준설을 해주지 않으면 큰 배가 진입조차 할 수 없는 좁은 물길을 지녔다. 그래서 저곳에 방파제를 건설해서 포위망을 완성해버리면, 함대는 라 로셸에 닿지도 못한다. 프랑스군은 바다에 오래된 함선을 띄우고 그 안에 돌을 채워 넣어 침몰시키는 첨단 공법으로 방파제를 완성한다. 결국 영국군은 씁쓸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군사작전 실패건으로, 찰스1세는 잉글랜드 국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대부분 잃게 된다.)

마지막 구원의 손길까지 무산된 라 로셸 시민들은 시장 장 귀통의 지휘 아래 용감하면서도 처절하게 저항한다.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을까. 32천 명의 시민이 5천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그들은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만다. 리슐리외 추기경의 라 로셸 포위 및 위그노 섬멸작전은 그렇게 성공했다. 잠재적 반란 세력을 제압한 루이13세와 리슐리외는 이후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틀을 다진 왕과 재상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저 바다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었다.
도시 방어를 위해 건설했던 각종 복합 시설들

 

라 로셸 공성전의 현장을 더 확인하려면 성곽 밖으로 나가서 해자를 따라 걸어보는 것이 좋다. 현재는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어서 전쟁터의 느낌은 사라지고 없지만, 역사를 알고 그 길을 걸으면 느낌이 다르다... 어느 순간, 살짝 오싹해졌다. 그 옛날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위그노들이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선 이 땅에 똑같이 서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봤을 하늘도 지금 우리가 보는 하늘과 똑같은 하늘이다.

이 길을 걷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내는 조금 걷더니 '무섭다'고 튀어(...) 버렸다. 할 수 없이 해자 터를 걷는 일은 그만 두었다.
성문 밖이었음에도 드문드문 성곽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들이 남아있다. 성곽 바깥에 유료주차장이 있고, 그 길로 죽 따라 들어가면 작은 물길과 함께 숲길이 나 있다 .  이것이 라 로셸 공성전 당시 해자와 방벽의 흔적이다 .

 

 

이제 배를 채우러 다시 항구로 나갔다. 뭘 먹을까 하다가, 원초적으로 먹어보기로 했다. 오이스터라는 단어가 보인다.

맛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하는 것으로...
하루가 저물어간다.

 


 

부록: 한국인의 저력

한국인의 저력은 정말 놀랍다. 비록 전 세계를 서양이 주름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끔씩 툭툭 튀어나오는 영웅적인 한국인들의 존재와 활약은 움츠러든 우리의 어깨를 잠시나마 펴게 해준다. 라 로셸에 갔을 때도 우리는 그런 인물을 또 만날 수 있었다. 위그노 최후의 숨통을 끊어버리기 위해 한껏 기세를 세워 몰려온 프랑스 정규군은 무려 15개월동안 라 로셸을 압박한다. 그때 시민들을 끝내 독려하며 전투를 지휘했던 군 사령관이자 시장이었던 사람이 바로 자랑스러운 한국인 장귀동이다.

그는 인조반정으로 어수선한 시국을 한탄하며 조국을 떠나, 한 척의 배를 타고 혈혈단신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페르디난도 마젤란이 개척한 항로를 따라 항해하여, 프랑스 서쪽 해안도시에 도착한다. 그는 당시 유럽 대륙에 불어오던 종교개혁의 바람에 큰 충격을 받고 그곳에 귀화하여 살았다. 그의 삶은 곧 라 로셸 시민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급기야 도시가 포위되었던 위급한 기간 중에 그는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제2의 도시 라 로셸의 시장에 당선된다. 그의 타고난 용맹함과 결단력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항전할 것을 맹세하고 도시의 모든 역량을 모아 당당하게 강력한 프랑스 군대에 맞섰던 것이다. 위 사진은 라 로셸 시내 한복판에 세워진 장귀동(Jean Guiton)의 동상이다......?

...... 자! 이것은 물론 당연히 지어낸 소리다. 그대로 믿는 독자는 안 계시리라 생각하며...... ^^

장 귀통 시장 : Jean Guiton(2 July 1585 15 March 1654). 라 로셸 태생으로 유명한 위그노 지도자 중의 한 사람. 1627-1628년 라 로셸 포위 기간에 라 로셸의 시장이 되었고, 루이13세의 군대에 맞서 맹렬히 항전했다.

 


 

수백 년 된 도시에 머물면서 그 당시를 떠올리는 이 순간은 꿈만 같다. 역사를 모르고 이 자리에 서면 도무지 아무 느낌도 없을 그런 장소일 뿐이다. 그래서 거길 왜 가나 싶은 그런 곳이다. 그러나... 알고 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고 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지는 법이다.

라 로셸이 정확히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