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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탈리아-프랑스 취재여행의 마지막 방문도시로 스트라스부르를 택했다

스트라스부르 행 기차는 파리 동역(Gare de l'Est)에서 출발한다.
파리에서 떼제베로 2시간이면 당도하는데, 독일 국경에서 매우 가깝다. 하이델베르크 바로 옆인데, 그렇다면 문화적으로도 독일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였을 듯하다.
서쪽 끝 라 로셸에 갈 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이번엔 동쪽 끝이다.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서 페친을 뵙고 간단한 식사와 함께 대화를 나눈 후, 오후 일정을 시작했다.

 

"우리는 왜 스트라스부르에 가는가.” 2017년 봄에 종교개혁 답사팀과 함께 스트라스부르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했던 강의 제목이다. 종교개혁지 탐방이니까 종교개혁자들이 활동했던 도시를 가는 것은 맞는데, 그런 도시가 한둘이냐 이거다. 그 수많은 도시 중에서 왜 하필, 굳이, 스트라스부르를 가는지, 이유가 필요하다.

쁘띠 프랑스 구역.

스트라스부르의 구 도심 ‘쁘띠프랑스’는 안동 하회마을처럼 강으로 오목하게 둘러싸인 마을이다. 유럽 여행자들이 예쁜 마을로 손을 꼽는 곳이며 신혼여행자들의 인기 코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쁨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쁘띠 프랑스는 과거에 프랑스 난민들과 집창촌이 몰려 살던, 그야말로 열악한 주택지구였다고 한다. 그러던 곳이, 종교개혁자들의 유입과 함께 도시 개혁과 정비가 함께 이루어지면서 예쁜 마을로 변모했다.

스트라스부르에 와야만 했던 칼뱅

칼뱅도 이 아름다운 도시를 사모했다. 스트라스부르는 부쩌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상당한 수준으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던 도시였다. 그래서 칼뱅은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내고 나서 원래는 스트라스부르로 가려고 했다. 그곳이 ‘편안히 공부하기에’ 좋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의치 못했고, 일단은 제네바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먼저 종교개혁을 추진하던 파렐을 만났다. 그 후 - 잘 알려진 일화와 같이 – 파렐의 추상같은 호통과 강권으로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하지만 초기의 강경한 개혁 작업은 이내 제네바 의회와 일부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혔고, 파렐과 칼뱅 둘 다 도시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제네바로부터 겪었던 일들을 이 글에 적지는 않겠다. 결국 파렐은 뇌샤텔로 가고, 칼뱅은 애초에 가고 싶어했던 스트라스부르로 발걸음을 돌렸다.

쁘띠 프랑스... 이쁘긴 이뻤다. ㅎㅎㅎ

칼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제네바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뒤로하고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을 때 아직 20대였던 젊은 칼뱅이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네바에서 받은 부당한 처우를 주위에 호소하거나 다른 종교개혁자들에게 상소할 기회도 있었다. 혹은 제네바에서의 일을 자신의 ‘목회 실패’로 보고 좌절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칼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신 이유가 있을 것으로 봤던 듯하다. 그는 곧장,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들과 힘을 모아 일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친 몸과 상한 심령으로 일단 며칠쯤은 퍼져서 쉬었지 싶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는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 유망주 청년이 여독을 풀고 있을 정도로 한가한 도시가 아니었다.

당연히 스트라스부르는 칼뱅만 사모했던 도시가 아니었다. 당시 1천 명 가까운 프랑스 개신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종교개혁의 도시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했다. 스트라스부르 교회는 프랑스 난민을 위해 프랑스어로 예배하고 설교할 설교자가 필요했다. 프랑스 누아용 출신 칼뱅이 이것을 담당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칼뱅은 그밖에도 프랑스 신자들이 모국어로 찬송할 수 있도록 시편찬송가도 프랑스어로 번역(16곡)했다. 칼뱅은 4~5백 명의 청중을 보살펴야 했는데, 주일에 두 번의 설교를 포함해서, 더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교와 강의를 매일 했다. 이 시기에 기독교강요 2판을 썼고, 로마서 주석도 썼다.

칼뱅은 이곳에서 더욱 성숙한 목회자로 거듭난다. 버스에서 했던 강의의 콘셉트는 “우리는 성숙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였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버미글리, 마틴부써, 요하네스 스트룸 같은 동역자를 만나서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그들에게 배우며 어쩌면 칼뱅은 제네바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교회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고, 특히 교회의 조직과 정치와 교육 기법에 대해서도 많은 성숙을 경험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제네바에서의 성공적인 둘째 사역인 셈이다.

반대쪽에는 17세기에 건설된 다리 겸 댐이 있다. 돌로 만들어졌으며, 필요시 물을 가두는 역할을 하고 도시도 지키고 그랬나보다. 나는 이때는 이게 뭔지 몰랐기에, 그냥 특이한 형태의 지붕 부분만 사진으로 찍었던 것이다.
스트라스부르는 지역적 잇점으로 일찍부터 강을 막아서 통행세를 받아먹던 도시였다. 지금은 그 물길로 유람선이 다닌다. 배가 지나갈 때 빙글 돌아서 열리는 다리 위에 서보았다. "다리를 꼭 들어올릴 필요가 있나?? 돌리면 되지~" 뭐 이런 건가 ㅎㅎㅎ
칼뱅이 묵었던 집 근처에 도착했다. 근처에 과자점이 있는데 한글이 적혀있다. ㅎㅎㅎ 한국 관광객들이 좀 다닌다는 소리다.
칼뱅이 사역했던 부끌리에 교회당.
입구 명판에 칼뱅의 이름이 적혀있다.
출입하는 자가 있어서 재미삼아 이곳이 칼뱅이 살던 곳 맞냐고 물으니, 어라? 다른 주소를 알려준다...??!? 헐.. 우리는 팩트 채크를 하기 위해 잠시 후 스트라스부르 도서관에 가보기로 하고, 일단 답사를 계속 했다.
마틴 부써가 목회한 성 토마스 교회 건물. 마틴 부써는 칼뱅에게 신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구텐베르크 동상이 있는 광장.
도시 한 복판에 있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색깔 때문인지, 아름답다는 생각은 안 들고, 뭐랄까, 흉측해보인다고 해야 하려나... ^^;;
성당 앞 작은 광장에는 까페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커피 한 잔을 할 것이다. ㅎㅎㅎ
어? 이제보니 나는 콜라를 마셨네..
다음에 찾아갈 곳은 대학가였다.
요한네스 스투름의 김나지움(교육기관)을 찾아간 것이다.

토막상식: 지성(知性)의 체육관, 김나지움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뱅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교육철학자이며 인문주의자, 앞서가는 위대한 사상가였던 요하네스 슈투름(Johannes Sturm, 1507~1589)이다. 그가 설립하고 운영했던 교육기관 ‘김나지움’은 칼뱅에게 엄청난 인사이트를 주었으며, 후에 제네바에서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힌트가 된다.

슈투름이 왜 위대한 인물인가. 그는 가르치는 방법을 새롭게 시도했던 사람이다. 근대적인 수업 시스템과 교과 분류, 교과서 제작, 학교 운영의 조직화 등,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결과물들은 유럽의 중등교육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스트라스부르 시내 중에서도 가장 활기찬 느낌이 드는 학생의 거리(Rue Des étudiant)에 접어들면,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김나지움. 단어 자체는 ‘체육관’이란 뜻을 갖고 있으나, 실제로는 중등 학생들의 종합 교육기관이라고 보면 된다. 김나지움 건물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노란 벽과 파란 지붕을 한 웅장한 건물이다. 지금도 여전히 학교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김나지움 대문 옆에 “Pôle Educatif Protestant de Strasbourg(스트라스부르의 개신교 신앙의 중심)”이라고 적힌 문패에 눈길이 머물고 마음이 머문다. 종교개혁은 교회와 함께 다양한 분야가 함께 개혁된 과정이자 결실이다. 즉, 종교개혁 목회자 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이 함께 달려들어 매진했던 운동이다. 신학 뿐만 아니라 교육도, 상업도, 문화도, 삶의 아주 작은 영역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개혁된 삶을 살고자 했던 성도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있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아차. 그런데 우리는 지금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아까 그 예쁜 소녀가 알려준 칼뱅의 거처.
팩트 채크를 하러 가야 한다. 궁금해 죽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