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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켄의 (새벽에 가까운) 아침이다. 

2003년도에 이곳 공터(Höhematte)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토록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여전히 시원하게 개방되어 있어서 정말 좋았다. 도시의 난개발을 막아 누구나 알프스의 경치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이곳 사람들의 공공의식이 부러웠다.
2003년도엔 못 봤는데, 인터라켄 동쪽에 기차역이 하나 더 있다. 이곳에서 집결해서 오늘의 알프스 동선을 살펴보는 중.
기차가 산 허리에 있는 산악열차용 환승역을 향해 달린다. 해가 뜨면서 산을 비추는 모습이 차창 밖으로 보인다.
다른 열차로 갈아타는 중.
산악열차로 다시 갈아타고...
산악열차의 고도가 높아지고, 중간에 잠시 정차하는 곳에서는 만년설을 볼 수 있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니라서 그런지 막 엄청 신기한 것은 아닌데, 알프스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했다. 여기서 또 전망대 윗층으로 더 올라간다. 근데 여기서부터 현기증이 돌면서 가슴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고 몸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고산병(altitude sickness) 증세이다. 여러 사람 폐 끼치지 말아야 하겠기에 최대한 조심하면서 걸었다.
경치는 끝내줬다. ㅎㅎㅎ 2003년 알프스에 왔을 땐 한여름이라 눈을 많이 못 봤는데, 이른 봄엔 눈이 많았다.
괜찮은 척 하고 있지만 내심 걱정근심이 가득하다. ㅋㅋㅋ 아내 손을 꼭 잡고 다녔다.
2003년에 쉴트호른에서 봤던 건너편 봉우리들 중 하나가 이젠 코앞에 보인다.
다시 건물 내부로 들어와서 전시물도 보고, 빙하 내부에 만든 얼음동굴을 구경했다.
만년설을 밟아볼 수 있는 바깥으로 나왔다.
좀 무서웠고.. 무엇보다.. 너무 추웠다;;; 저런 복장으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이럴 땐 얼른 들어와서 쉬는 것이 답이다. 폼 잡고 앉아있지만 사실 고산 증세 땜에, 서 있기조차 두려웠다.
이제 하산한다. (살았다!) 스키 타는 분들은 여기서부터 수km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여기서 저런 액티비티를 하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좋은(?) 것을 보고 나서일까. 하산하는 산악열차에서, 다들 표정이 아련하고 기분이 몽롱하다. ㅎㅎㅎ
중간 환승역. 사람이 부쩍 늘었다. 오후에 올라오면 정신 없을 듯하다.
인터라켄까지 살아서 돌아왔다. ^^
이제 점심식사는 퐁듀를 먹어줘야... 

 


알프스 관광을 마치고 취리히로 떠난다.

취리히로 가는 길, 그림같은 마을들이 차창 밖으로 계속 지나간다. 사진에 제대로 못 담은 것이 한이다.

 

취리히 도착. 2003년 이후 두 번째 방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잠깐,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이해하기 위해 츠빙글리에 대해 알아보자. 루터와 동갑내기였던 츠빙글리는 초기 종교개혁의 역사에 있어서 루터만큼의 인지도와 중요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 역시 성경을 읽다가복음을 발견하고,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의 초기 종교개혁과 관련된 일화로는 특이하게도 소세지사건이 언급된다. 종교개혁과 소세지라, 얼른 잘 연결이 되지 않을 듯하다.

1522년 사순절 금식기간에 열두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소세지를 먹어버린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불필요한 규례에 저항하는 의미로 이런 행동을 한 것인데, 당연히 로마 카톨릭은 사순절 금식규례를 어긴 자들을 처벌하려고 했다. 이때, 사제였던 츠빙글리는 사순절에 육식을 금하는 것에 성경적 근거가 없고 하나님 주신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고 반박하며 소세지를 먹은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두둔했다. 이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취리히 종교개혁의 시작점이 되었다니 흥미롭다.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지 탐방팀이 꼭 봐야 할 다섯 곳을 꼽는다면 다음과 같다. (지도에 번호를 표시했다.)

➀ 츠빙글리 동상 / ➁ 그로스뮌스터 / ➂ 프라우뮌스터 / ➃ 성 베드로 교회 / ➄ 펠릭스 만츠 순교지

시간은 늦었고, 수많은 일행을 끌고 여기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기에, 이번엔 종교개혁지 탐방팀이 봐야 할 두 곳만 들렀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그로스뮌스터(좌)와 프라우뮌스터(우)
그로스뮌스터 가기 전에 다리 건너 바로 오른쪽으로 잠깐 돌아가면 바서교회당 뒷편에 쯔빙글리 동상이 있다. 그런데 솔직히 며칠 째 답사를 하다보면 이제 이런 동상은 식상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하나 풀어보자. 츠빙글리 동상을 자세히 살펴보자. 츠빙글리가 쥐고있는 것이 무엇일까?얼른 보이는 것은 칼이다. 종교개혁자가 칼을 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왜 칼을 쥐고 있을까? 중세 취리히는 경제적으로 로마에 예속되어 있었다. 당시 교황청은 수비대로 오직 스위스 용병만을 썼다. 산업기반이 열악한 알프스 북부의 취리히는 남자들이 용병으로 벌어온 돈으로 온 도시가 먹고 살았다. 그런데 취리히가 종교개혁의 물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자, 로마는 더 이상 이들을 용병으로 쓸 수 없음을 깨달았고, 로마의 눈치를 봐야 할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은 연합군을 조직해서 취리히를 철저히 부숴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로마 가톨릭을 따르는 스위스 연합군은 취리히로 쳐들어왔고, 츠빙글리는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물론, 취리히 하나의 힘으로 전체 연합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전쟁은 금방 끝이 난다. 츠빙글리는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나무 밑에 쓰러져 있다가 잡혀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라는 굴욕적인 요구에 불응하고 무참히 살해당한다. 츠빙글리 동상에서 그가 칼을 쥐고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인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우리는 칼을 쥔 츠빙글리의 동상 앞에서 인증샷은 찍어야 하겠으나, 동시에 손에 쥔 칼 뒤에 있는 성경에도 눈길을 주어야 한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그의 심장 속에 품었을, 성경에 말이다.
그로스뮌스터는 취리히를 대표하는 대성당으로, 취리히 시내 웬만한 곳에서는 저 쌍둥이 탑이 보인다. 900년동안 거의 그대로 보존된 대단한 건물이다. 그로스뮌스터 남쪽 출입구 청동문에는 츠빙글리의 일생이 묘사되어 있으니 놓치지 말고 살펴보자. / 그로스뮌스터 북쪽 벽에는 불링거 석상이 있다. 함께 다녔던 분들이 아까 봤던 쯔빙글리를 떠올리며 "이 사람은 누꼬?", "쯔빙글리 사촌 아이가?" 하셔서, "쯔빙글리 사촌이 아니라 사위라고 알려드렸다. ㅎㅎ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에 눈을 뜬 뒤,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었던 것.
내부는 종교개혁 당시 리모델링이 되어서 다른 유럽의 대성당들에 비하면 아주 단순한 편이나, 유적과 석상 등은 복원된 상태다.
물의 도시 취리히는 지난 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아주 짧게 (1시간 조금 넘게??) 있다가 떠난다. 그래서 유럽 도시 중에서 두 번이나 와본 곳이지만 제대로 모른다. 언젠가 "또" 오게 된다면(ㅋㅋㅋ) 그땐 적어도 2박 정도는 머물면서 도시를 느껴보고 싶다!

 

※ 취리히 종교개혁에 대해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

 

소시지 섭취 사건과 취리히의 종교개혁 - mytwelve

종교개혁지 탐방은 이제 스위스로 넘어간다. 그동안 종교개혁자들이 힘들게 버텨오던 곳을 주로 돌아보았다면, 지금부터는 종교개혁이 비교적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곳들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유산을 생각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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