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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프로젝트/캐터키즘(catechism)

요리문답에 증거성구가 반드시 있어야 하나?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이것이 성경과 별개로 인간적인 사고활동에 의해 만들어졌을 거라는 상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 스스로가 자초한 면이 있습니다.
교리적 진술 뒤에 따라붙는 성경 증거구절 말인데요,
그게 아주 엉뚱한 것이 붙어있거나, 치우쳐 있어서, 아전인수격으로 보일 때가 간혹(아주 간혹)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통계적으로 매우 드문 케이스이지만, 그런데 인간은 그런 예외가 늘 크게 보이기 때문에,
이거 전체가 뭔가 문제가 있다! 라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사실 이런 성경 증거구절이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리문답은 ‘성경 전체’를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반드시 해당 성경구절만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특정 구절 몇 개를 들어서 근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교리는 성경의 특정 구절을 매칭시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신앙고백도 마찬가지구요.
사도신경에 증거성구를 달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함께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작성했던 위원들은 처음 의회에 제출했던 문서에서는 증거구절을 싹 뺐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교리에 대한 거부감 혹은 의심으로 그것이 정말 성경에서 추론한 것인지를 물어왔고, 그에 답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관련성구를 하나 둘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예로, 루터의 요리문답을 보면, 성례에 대해 설명할 때 몇 가지 증거구절을 언급하면서, 성례가 성경에서 비롯한 것임을 카톨릭의 성례와 비교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초기 요리문답이나 신조에는 증거성구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아예 증거성구를 끼워 넣은 요리문답들이 유행처럼 나오기 시작합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작성자들은 당시의 유행과는 달리 증거성구 없는 신조와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의회에 제출했으나, 역시 거부됩니다. 증거성구를 달아서 다시 제출하라는 것이죠.. 지금 우리가 보는 문서는 그렇게 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배려해서 증거성구를 적어두었더니, 보십시오, 훗날 이 증거성구는 요리문답 자체를 공격하는 용도로 쓰이게 됩니다. 당시 작성자들이 성경을 잘 몰라서, 해당 교리에 잘 맞지 않는 엉뚱한 구절을 달았다는 것이지요.. -_-;; 이런 공격이 들어올 것을 요리문답 작성자들은 처음부터 우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자신들이 그런 오해를 받게 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요리문답 작성자들은 그 증거구절을 달아주었던 것입니다. 이걸 하느라, 회의일정과 소요비용이 훨씬 더 늘어났지만 말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당시 작성자들의 성경해석원리까지 덤으로 얻게 되어서 결과적으로는 다행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로 인한 유용성보다도 그들의 '마음'입니다.
요리문답 작성자들은 그 요구가 합당치 않음을 알면서도 그 요구를 들어주었고,
기왕 하는 것 최선을 다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자세가 이런 것들입니다.
종교개혁에는 기다림과 배려, 그리고 겸손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습니다.

 


 

추신 :

참고로, 그보다 앞서, 알미니우스 사후 제출된 항명서에 대해, 고마루스 파에서 재천명한 반항명서에는, 성경 레퍼런스가 일절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 본문 그렇게 몇 개 골라서 끌어다 쓰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로 저는 해석합니다. 도르트 총회는 항명파의 내용에 반박하는 반항명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단 하나의 성경 본문도 본문에 삽입하지 않았지만 해당 문서를 통과시킵니다. 

반면에 항명서에는 다섯 개의 성경구절이 명시됐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요한복음 3장 36절 :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2. 요한복음 3장 16절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 요한1서 2장 2절 :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4. 요한복음 15장 5절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5. 사도행전 7장 및 여러 곳 :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특별히 51절과 같은 표현들 - 편집자주)

이게 뭡니까... 고작 이 다섯 구절들, 그것도 요한복음 한 권에 치중된 근거들로, 그 난리를 일으켰다니... 도대체 성의가 없어요, 성의가...

대조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만든 표준문서에 사용된 성경 구절은 총 1만 개가 넘습니다. (6천 여 항목, 1만 여 구절) 할려면 이 정도는 해놓고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