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돌로미티를 드라이브로 즐기는 날이다. 이날 나는 코감기 증상 때문에 두뇌활동이 온전치 못해서, 만사가 다 귀찮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돌로미티는 기어코 봐야...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미 구글맵으로 돌로미티 산맥 구석구석을 다 디비면서 여기로 가면 멋있겠다 싶은 지점들을 다 마킹해두었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로 그걸 다 누리는 건 좀 무리라는 생각에, 당일 아침에 좀 더 가까운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간의 여행 경험상, 이렇게 다급하게 찾으면 결과가 좋을 것이 없었지만...
사실 우리 숙소 바로 앞산과 뒷산도 이미 만년설이 쌓인 돌로미티 끝자락이다. 하지만 볼차노 쪽으로 30분 쯤 달리자 만년설이 쌓인 또다른 봉우리들이 수없이 보였다.
볼차노를 우회하여 동쪽으로 달리는데 어느 순간 저 멀리 고래가 입을 벌리고 솟아오르는 듯한 장면이 보였다. 그 순간, 감기 땜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심장이 덜컹! 하는 감동이 있었다. 황급히 아내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외쳤다. (이 카테고리 첫 글에 링크한 구글맵을 살펴보면 이 사진을 찍은 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있도록 해두었다.)
Urtijëi라는 마을을 지나서, Santa Cristina 마을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저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이 타이밍에 내 감기 증세가 악화되어, 이렇게 좋은 걸 봐도 그저 눈 감고 드러눕고만 싶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이게 뭔가... 곤혹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여기까지 와서 후퇴하기엔 너무 아깝다며, 자기가 대신 운전을 해줄테니 더 깊이 들어가보자고 했다. 나는 그냥 조수석에서 쉬면서 맘 편히 사진이나 찍으라고~
평소같았으면 위험한 산길을 아내에게 맡기지 않았겠지만, 지금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까지 며칠동안 여행 일정이 다 좋았지만, 신체적으로는 은근히 무리가 쌓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운전대를 놓고 아내와 자리를 바꿔앉자마자 증세가 호전되는 기분이었다. ㅋㅋㅋ
아내는 겁도 없이 처음 몰아보는 렌터카 운전대를 쥐고, 구글맵 하나만 믿고,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 멀리 고래 입처럼 보이던 사쏘룽고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눈 좀 감고 쉬겠다던 나는 연신 고개를 돌리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내 역시 새로운 모험에 긴장과 흥분이 가득해 보였다. (얼마나 떨렸을까 ㅋㅋㅋ)
짐작하겠지만, 이 장엄한 장면을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가파른 고갯길을 구비구비 돌아서 어느덧 능선까지 올랐다. 저 멀리 마을은 보이지도 않는다. 알프스 봉우리들은 해발 고도 3천미터 정도는 그냥 기본으로 깔고 시작한다.
사쏘룽고의 자태가 서서히 드러난다.
이 부근에서 간단히 하이킹도 할 수 있고 주차장도 있지만, 스키 시즌도 끝나고 오늘 날씨도 별로고 해서 진입로가 막혀있었다. 서서히 차를 몰고 조금 더 올라가봤다.
산마루 분수령까지 올라가자 잠깐 차를 세울만한 공간이 나왔다. 여기서 영상을 찍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별 것 아니게 보이지만, 아까 그 마을로부터 순식간에 해발고도 1천미터 정도를 올라왔다. 우리는 그때 무슨 히말라야 등정이라도 해낸 기분이었다. ㅋㅋㅋ
내려가는 길에 보이는 또 다른 봉우리 '피츠 보에'. 여기도 엄청난 곳이었다.
3D 구글맵에서 보면 대충 저런 코스로 운전한 셈이다. 왼쪽 봉우리가 사쏘룽고. 오른쪽이 두 번째 영상에 나오는 봉우리. 그 사이에 빨간 동그라미 부분이 우리가 지나간 도로의 가장 높은 지대, 분수령이다.
분수령을 넘자마자 날씨가 급격히 흐려졌다. 우리 마음은 여기서 간단한 트래킹이라도 하면서 분위기를 더 즐기고 싶었지만, 우리 육체는 너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올라왔기에, 신속한 후퇴를 결정했다. ㅎㅎㅎ
마침 배도 고프고, 또 이 근처에 Rifugio Ciampolin라는 이름의 역사적인 "피난처" 겸 레스토랑이 있다고 해서 거길 가려고 방향을 잡았지만, 구글맵 만으로는 눈 쌓인 진입로에서 확신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했다. 나중에 차분히 구글맵을 보니까 아까 우리가 긴가민가 한참 고민했던 그 지점이 입구가 맞았었다.
점심 때를 놓쳐서 다급하게 아랫마을들을 뒤져가며 적당한 식당을 물색했지만, 스키 시즌이 끝난 직후라서 그런지 문 닫은 집이 많았다.
사람 없는 동네 분위기가 오싹하기까지 해서 서둘러 빠져나왔다. ㅎㅎㅎ
또다시 절박한 구글링을 거쳐, 인근 도로변에 곧 오후 3시에 휴식시간이 시작되는 이탈리아식 페스트푸드 휴게소를 하나 발견하고 거의 뛰쳐 들어가다시피 해서 휴식시간이 채 3분도 안 남은 시점에 아슬아슬 주문을 성공시켰다. ㅋㅋㅋ
화장실도 가고, 열량도 채우고, 흥분도 가라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며 비로소 안정과 평안이 찾아왔다. 다만 식사는... 우리 실력으로 도저히 해치울 수 없는 엄청난 양을 퍼주는 바람에(남은 거 다 떨이로 넣어준 느낌ㅋ), 거의 절반씩 남겼다. 참고로, 이 식당은 온 동네 터프한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아지트였다. ㅎㅎㅎ
끊임없이 이어지는 멋진 경치를 보며 달리는데, 갑자기 아내가 "뭐여! 뭐여!" 한다. 앞을 보니 남녀 경찰 둘이서 우리 차를 세운다. 사실 우리가 깜빡 하고 여권과 국제면허증 등을 숙소에 두고 나온 터라, 낭패로구나 싶었다. 게다가 경찰이 정지하라며 흔든 수신호를 못 알아먹고 계속 달리려다가 섰던지라, 경찰이 우리에게 "신호 못봤냐"면서 머라머라 하는데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아서 더욱 혼비백산했다. 그 와중에 나는 우리가 선량한 관광객임을 강조하기 위해 - 전에 미국 경찰에게 걸렸을 때 효과를 봤던 치트키 "디스 카 이스 렌터카!!!"라는 주문을 썼다.
우리 얼굴 표정이 어찌나 심각했던지, 경찰이 오히려 당황하는 느낌이었다. 여자 경찰이 최대한 인자한 표정으로 웃으며 다가와 "돈 워리 돈 워리" 하면서 강아지 쓰다듬듯 안심을 시키더니, 매우 철학적인 질문을 두 개 던졌다. "어디서 왔느냐", "사쏘룽고요!", "어디로 가느냐", "트렌토 비엔비요!" 다행히 그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우리를 신원확인 없이 그냥 보내줬다.ㅋ 다음에 또 빨간 동그라미가 보이면 서라고 ㅎㅎㅎ 면허증 보자 했으면 아주 여기서 입장이 곤란할 뻔했다.
근데 대체 왜 세웠지?? 아마 국경지역에 가까운 편이라 불법 이민자들을 가려내려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 특히 내가 - 딱 봐도 불법 이민자처럼 생겼을텐데, 신원 확인을 제대로 안 한 이유는??? #풀리지않는신비
암튼.. 별 일 없었으니 다행 ㅋ
돌아오는 길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숙소에서 밤하늘의 별을 아이폰으로 찍으면서 오늘 하루를 돌아보는데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온다.
아내와 함께 한 또 하나의 모험.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하루를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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