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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프로젝트/히스토리(history)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잘 알려지지 않은 핵심 업무 : 목사를 세우는 일!

1642년 12월 잉글랜드 장기의회 하원은, 왕당파 군대와 그들의 세력에 의해 쫓겨난 의회파 목회자들의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를 수립한다. 이 ‘자리를 빼앗긴 목회자를 위한 위원회'는 의회파 점령 지역 내에서 '스캔들이나 일으키는 사악한 성직자들'을 내쫓는 일도 함께 진행했다. 장기의회는 주교전쟁에 실패한 찰스1세의 콧대를 꺾으면서 맨 처음 성직자 임명권을 통제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로드 대주교의 탄핵 이후 - 특별히 왕이 런던을 떠난 이후에, 의회는 주교와 왕실에 속했던 성직자들의 임명권까지 획득할 수 있었다. 정신상태가 가히 의심스럽거나 타락한 성직자들을 가장 먼저 쫓아 냈고, 그 다음 타겟은 무능하고 무식한 성직자들이었다. 이 일은 물론 전쟁통이라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일이기는 했으나, 진정한 종교개혁을 소망하는 신실한 신자들과 그들에게 순수한 복음의 진리를 떠먹이고자 했던 수많은 청교도들에게는 반갑고 소중한 기회였다.

1644년에 이르러 의회는 각 지역위원회를 추가로 설립했다. ‘자리를 빼앗긴 목회자를 위한 위원회'의 감독 아래 각 지역위원회는 목회자와 교수들을 임명하거나 해임할 권한을 받았다. 지역 교구들과 대학은 ‘정통 개혁신학에 입각하여 신실하게 가르치는’ 목회자, 교사, 학장, 교수, 연구원들을 점점 얻게 되었고, 하원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이렇게 각 지역위원회에서 임명된 자들을 면접하고 검증할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작업은 런던을 중심으로 장로회제도가 공식적으로 선포된 이후로도 꽤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심지어 총회의 마지막 기간은 거의 전적으로 이 일에 매달렸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dixhoorn이 정리한 회의록(전5권)의 이러한 기록들은 잉글랜드 의회가 기존 국교회를 실질적으로 개혁해갔던 역사적 산 증거가 되어 주었다.

기록에 따르면 대략 1,950명의 목회자들과 교사, 학자들이 2000개가 넘는 교구와 학교,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놀라운 것은, 위의 인원수는 단지 총회가 직접 시취한 인원에 불과하며 그것도 훼손된 문서에 더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기록은 카운트 되지 않은 인원수라는 것이다. 남아있는 문서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본 dixhoorn은 총회가 많게는 5000명까지도 시취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당시 잉글랜드에 8,600개의 교구(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교회를 뜻함)가 있었으며 웨일즈 자치령을 포함하면 아마도 10,000개가 넘었을 것으로 예상할 때, 그렇다면 예루살렘 챔버에서 모였던 총회의 케파만으로는 저 모든 사역자의 시취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아마도 다른 지역위원회에서도 일을 나눠서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장기의회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개혁의 일부가 드디어 실현된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살살 하려는 생각도 없었지만, 그나마 왕당파의 반역과 뒤이은 내전 발발이 거기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 이들이 부정하게 가지고 있던 재산을 압수하는 것만으로도 새로 임명된 목회자들의 생활비가 충당 되다시피 했다. 중세시대 수도원들이 가지고 있던 부가 16세기 수도원 해체로 인해 세속 정권에 분배되었던 것처럼 이때도 의회파 점령 지역 내에 있는 왕당파에 속한 성직자들의 재산은 의회의 통제로 고스란히 넘어왔던 것이다. 

의회는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일했다. 주교들에게 주어지던 특권은 하나씩 하나씩 정지되었으며, 봉급 지급도 중단되었다. 그동안 성직자의 생계를 위한 봉급, 재판, 서임, 취임은 주교에 의해 통제되어 왔다. 이제 의회가 그 일을 하게 되었고, 1649년까지 이 정책을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최종적인 개혁은 드디어 왕실을 향했다. 1646년 상원은 국새를 가진 위원회와 함께 의기양양하게 왕실 목회자를 서임하는 권한을 행사한다. 의회는 성직자의 봉급삭감과 구조조정의 권한을 신나게 행사했다. 장기의회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들은 10여년간, 자기가 할 일을 거의 다 했다. 그리고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장렬히 해산되었다.

Q. 구체적인 목사 시취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시취는 주로 목회자의 교육상태와 정통성, 적합성 등이 시험되었다. 절차는 결코 쉽지 않았다. 수천 명의 목사가 일거에 필요해지는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총회는 결코 함부로 목사를 세우지 않았다. 총회는 서류상 하자가 발견되거나 혹은 구체적이지 않은 목적이라면 목사 시취를 거절했다. 그리고 면접을 통해 확신이 들지 않으면 연기하곤 했다. 그들은 총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장로회 정치원리에 입각해서 목회자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지원자가 적합하다고 여기면 '시취됨'이 허락되었다. 시취에는 설교도 포함되었는데 정해진 본문에 대해 총회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었다. 보통 총회의 공적 모임이 시작되기 전 아침에 이 시험을 행했으나, 때로는 지역 교회에서 주일에 설교함으로써 대신하기도 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보통 그 자리에 총회 위원 한 명 이상이 보고서 작성을 위해 참석해 있었기 때문이다. 지원자는 본문을 받고 하루 뒤에 설교를 해야했다. 목사 시취 위원들은 지원자에게 논리, 언어, 신학, 이전의 삶, 그 삶을 떠나는 이유 등을 질문했고 그의 직분에 대한 특별한 소명이 있는지 물었다. 지방 교구 지원자의 경우 그 지역에 대한 지식도 요구되었고, 그 지역인들에 대한 관심의 정도도 때로는 회의록에 언급되어있다. 끝으로, 총회 전체는 지원자의 추천서와 각 위원회의 추천서의 힘에 따라 지원자를 승인하는 투표를 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흑곰북스에서 나온 "특강 종교개혁사"를 읽어보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