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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프로젝트/ETC

샴푸, 제로콜라, 전기차 그리고 진라면

1.

20년 전 내가 화장품 업계에서 일할 때 우리 사이에서 이슈가 됐던 것은 샴푸의 세계에서 벌어졌던 폭발적 시장 확대 사례를 어떻게 한 번 더 해먹을 수 없을까?였다. 사내 공모도 열고 하여튼 한바탕 난리였던 기억... 샴푸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보통, 경제가 발전하며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위생 개념이 확산되면 자연스럽게 샴푸와 린스의 매출이 늘어난다. 매출 그래프가 어느 정도 급하게 치고 올라오다가, 한계점에 다다르면서 매출 정체가 일어난다. 이때 어느 기막히게 머리 좋은 양반이 생각한 묘수가 샴푸 매출을 더블로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손상된 모발용" 샴푸를 만들어 파는 것이었다.

시중에 나오는 화장품류는 사실 제품 개발 단계에서 보면 단순한 물질이다. 결국 글리세린의 농도를 어떻게 할 것이며, 거기 무슨 향수를 배합했느냐가 전부이다. 고급 향수를 쓸수록 비싼 화장품이 된다. 글리세린 농도가 진하면 로션, 농도를 낮추면 에센스나 세럼, 점성이 거의 없으면 스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철저히 구분하면서, 화장 단계를 따지고 뭐 이것저것 고려하면서 지능적으로 화장을 하시던데, 만들어본 사람 입장에서 그건 다 그냥 점성이 조금씩 다른 글리세린에 향수를 섞어서 예쁜 통에 담은 것일 뿐이다. 그걸, 이름을 각각 달리 해서 4배의 매출로 만든 것이 화장품 업계의 오랜 비밀이고.

샴푸도 마찬가지다. 점성을 어느정도로 하느냐에 따라 묽은 샴푸도 나오고 진한 샴푸도 나오는데, 어느 날 그 기막히게 머리 좋은 양반은 두 샴푸 중 하나에 "손상된 모발용"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팔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리고 제대로 먹혔는데, 거의 모든 현대인은 자기 머리를 손상된 모발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시중에 나온 그 손상된 모발용 딱지를 붙인 '농도가 조금 다른 샴푸'는 불티나게 팔렸고, 놀랍게도 사람들은 다른 식구들은 괜찮은 모발일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위해 일반용 샴푸도 계속해서 구매했다. 덕분에 매출은 더블이 되었....

업계마다 이런 기발한 매출 증가 아이디어를 내놓는 사람이 그 바닥의 레전드가 되곤 한다. 찾아보면 이런 게 더 있을 것이다.

 

2.

반면에, 비슷해 보이지만 매출 향상과는 전혀 무관한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제로" 시리즈이다. 내 경우 13년 전 골방에 쳐박혀 특답이 퇴고에 몰두하던 시절에 코카콜라 제로를 쌓아놓고 마셨던 것을 시작으로, 웬만한 음료는 제로가 있으면 제로를 선택해서 마시고 있다. 액상과당 섭취를 줄여보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마시고 나서 개운한 느낌이 좋아서 제로를 선택하고 있는데.. 앗.. TMI...

제로 음료는 아쉽게도 매출 증대를 폭발적으로 시켜주지는 못한다. 이게 제한된 용량의 뱃속에 담기는 제품 특성상, 제로를 마신 사람이 일반 콜라를 또 마실 수는 없는 문제가 있다. 제로 음료 판매는 기존 음료 판매를 깎아 먹는다. 즉, 돈이 더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로 콜라, 제로 맥주 등이 세상을 점점 더 장악하고 있으니, 뒤쳐지지 않으려면 다른 음료수도 제로화(?)의 물결에 어쩔 수 없이 동참해야 한다. 그래서 요즘, 어설픈 제로 음료들이 우후죽순 나오고 있다. 마음이 급하다는 뜻이다.

비슷한 예로 전기차가 있다. 기존 내연기관 차량 회사들이 미치고 환장할 일은, 전기차로 빨리 바꾸긴 해야겠는데, 전기차 하나를 팔 때마다 기존 내연기관 자동차 하나를 못 팔게 되니, 자사 매출을 스스로 깎아먹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전기차니까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손해를 감수하며 전기차를 만들어야 된다. 반면에 미국이나 중국에서 애초에 전기차로 새로 시작한 회사들은 깍아먹을 기존 매출이 없으니, 현찰을 아주 쳐 모으고 있다.

 

3.

또 다른 상황이 있다. 대표적으로 진라면의 성공 사례이다. 얘는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순한맛과 매운맛으로 나눠서 파는 단순하고 전통적인 방식을 썼을 뿐인데도 매출 따따블을 찍는 케이스인데, 위 1번도 2번도 아닌, 소비자에게 경쟁을 붙여 이슈를 장악하여 성공한 케이스이다. 음식 문화에 약간의 '게이미피케이션'을 적용했다고 할 수 있다. 순한맛파와 매운맛파를 갈라서, 일종의 패싸움을 붙이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기호를 소중히 여김 받길 원한다. 그래서 설령 남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나 스스로 인정하겠다는 단호함으로 자신이 원하는 맛을 선택하고 기꺼이 장바구니에 담는다. 그 과정에서 진라면 매운맛은 기존 매운맛의 강자였던 신라면의 시장을 빼앗아 왔으며, 진매들의 진격에 위기를 느낀 순한맛파들은 경쟁적으로 다른 잡다한 라면의 섭취를 중단하고 진순이로 대동단결 했다. 이 과정에서 오뚜기 진라면의 시장 장악력은 오히려 커졌다.

결론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보면 마케팅의 세계에서 어느 하나 웃프지 않은 것이 없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볼 수 있겠다. 1번을 통해서, 나는 호구인가 아닌가를 생각해볼 수 있겠고, 2번을 통해서는 불쌍한 레거시 업체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겠고, 3번을 통해서는...

... 점심 때 라면 끓여야겠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