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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프로젝트/히스토리(history)

장로교회, 합의, 회의체

해마다 총회 때가 되면, 장로교회 교인으로서 보고 듣기에 괴로운 부끄러운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물론 감리교회쪽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쑈킹하기 그지 없지만, 내가 속한 교회의 소식에 더욱 놀라고 가슴아픈 것은 인지상정이다. 올해는 좀 나은가 싶은데, 그것은 총회의 형편이 나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내가, 우리가, 무감각해진 탓이다. 상황은 여전하시다.

 

왜 장로교회는 그토록 엉망일까? 이상적이라는 제도가 왜 그렇게 추한 모습을 대내외로 허용하는 것일까? 법을 몰라서일까? 타락한 자들만 골라서 총대가 되는 것일까? 옆에서 지켜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귀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법을 아는 분들도 널려 있다. 그런데 왜, 왜 그럴까?

 

아주 쉽게 말해서, 장로교회 제도의 근간은 기본적으로 "겸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한 개인에게 모든 권한을 주어서 교회 일을 판단하게 하지 않고, 우리는 누구나 부족하고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제도이다. 그래서 여럿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는 회의체로서의 교회 형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각자가 자기 깜냥에 드는 생각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우기지 않고, 성경으로부터 추출한 교회법에 따라 회의를 통해 다른 성도에게도 품어주셨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겸허히 살피며, 뿐만 아니라 상식과 품위를 존중하며 질서있게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장로교회이다.

 

이러한 회의체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합의"하는 기술이다. 우리는(한국인은) 부끄럽게도 합의라는 단어를 잘 모른다. 이 단어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나 사용하지, 일상 생활에서나 직장 생활에서나 합의를 잘 이끌어내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교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주장과 주장이 끊임없이 충돌할 뿐이고, 대개는 가장 쉽고 편한 길로 다수결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마지못해 택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가진 한계로 인하여, 다수결이 교회 안에서 항상 선할 수는 없다. 많은 경우 그것은 다수의 폭력이 된다.

 

장로교회가 더 이상의 망신을 피하고, 앞으로도 유지되고, 이웃에 덕을 끼치는 존재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을 민감하게 준비해야 한다. 가장 먼저는 교회법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대화법과 회의 방법을 익혀야 한다. 이를 위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회의체가 성경적이라고 믿는다면, 그 회의체의 바른 작동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기만이 옳다는 교만을 버려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겸손하지 않은 장로교회는 존재 의의를 상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