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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프로젝트/캐터키즘(catechism)

서평 -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서평]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황희상 저,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지평서원, 2013.

 

오늘날 [교리]라는 말은 한국교회 현장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까요? 아마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이해되는 개념이 [dogma]일 것입니다. 이 dogma는 doctrine과 유사한 의미인데 사회적으로는 정책(policy)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policy보다는 좀 더 개괄적이고 표어와 같은 느낌으로 사용됩니다. 즉, 어떤 사상이나 주장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정신을 말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 말이 교회 현장에서 사용될 때에는 각 종파들의 독특한 사고체계나 신학체계를 사용하는 교의신학적(systemic theology)의미로 보통 사용됩니다. 그래서 보통 [교리]라 하면 특정한 종파의 신학적 주장을 정리한 개념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입니다.

...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됩니다.

물론, 교리라는 개념에 그런 것이 절대로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교리에는 그 교리를 만든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앙체계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는 결코 특정한 종파의 가르침이나 체계로만 설명할수는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데 매우 협소한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신론, 인간론, 교회론, 종말론 하는 식으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은 [교리]라는 개념과 [교의신학]이라는 개념을 혼동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교리가 아니라 교의신학의 영역입니다. 즉, 기독교가 믿는 여러가지 내용들을 변증하고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일련의 신학적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이것은 사실 일반 성도들의 영역도 아니고 일반 성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용들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교회 현장에서 가르치려고 하다보니 온갖 부작용이 일어나고 신학의 기초 영역에 대한 이해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성도들에게 무리하게 이런 내용들을 주입시키려 하니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누군가가 여러분을 일주일에 두시간씩 강제로 자리에 앉혀 놓고 핵물리학 혹은 항공공학을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시간이 간절히 기다려 질까요? 저같으면 온갖 핑계를 대고 거기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무슨 소리인지도 개념도 모를 단어들을 나열하며 삼위일체론이니 단성설이니 양태론이니 이런 소리를 앞에서 하고 있으면 그것을 재미있게 들을 사람은 극히 일부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곧 소멸해 버리고 말죠. 그러면 아마 그 행사를 주관하는 목회자나 지도자는 그럴 것입니다. "요즘 성도는 믿음이 없어..." 정말 그럴까요? 그 강사는 일주일에 한 번 관심도 없는 전문영역을 강제로 배우라면 믿음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요? 교회 [교리교육]에 대한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에 반해 [교리]는 그렇게 복잡하거나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교리란 한자어로 敎理, 즉 신앙의 이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이 어디에서부터 왔으며 어떻게 전달되었으며 그것이 나의 삶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라면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라면의 구성요소를 원자단계에서부터 분석하고 이것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라면을 맛있게 끓여 먹는 것은 대부분 즐거워하는 것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리와 교의신학은 이만큼 차이가 납니다. 라면을 분석하는 것과 라면을 삶에 사용하는 것(맛있게 먹는 것)의 차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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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의 대상이 무엇이며, 자신은 무엇을 믿으며, 그것을 왜 믿으며, 그것은 어떤 과정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그것의 결과는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알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랜 시간에 걸쳐 설명하고 정리해 놓은 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각 교파별로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개혁신교(reformed church), 즉 종교개혁 이후에 탄생한 개신교 계열의 교회들은 큰 그림에서 거의 동일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교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예전의 기독교인 가톨릭과는 다르게 믿고 다르게 고백하는지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런 결과물들이 종교개혁 직후부터 시작되어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그 산물들이 바로 현재 개신교회에 다니고 있는 신자들에게 들려져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 신조]등과 같은 중요한 개혁교회의 교리문답서들과 신앙고백서들입니다.이 문서들을 살펴보면 의외로 신론이니 종말론이니 하는 소리들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아니 교리문답서에 그런 말이 없다니요! 그런데 사실 그게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교리문답(catechism)은 그런 신학적 용어들을 가르쳐주는 학술서가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에게 무엇이 바른 신앙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인지를 묻고 답하기(Q & A)형식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는 성도를 해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교리를 그러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교리가 뭔지를 처음부터 잘못 알았거나 혹은 신학교 다닐 때 교의신학을 F나 그에 근접한 점수를 맞아서 상처가 많은 사람이거나. 물론 둘 다 문제입니다. 

이런 중요한 개혁교회의 교리문답서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성경과 교회에 대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 어떻게 고백하고 이해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은 매우 당연하게도 오늘 나의 신앙의 자리를 이해하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당연합니다. 한국교회는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교회들로부터 시작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종파가 대한예수교 오징어빵상회가 아니라면 이 신앙고백서들의 내용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의 태동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신앙들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또 내가 무엇을 후대에 전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이 교리에 대한 이해와 교육이 적어도 한국교회의 태동 때부터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산업화 시대 이후 한국교회를 지배한 키워드가 [전통의 계승]에서 [돈과 성장]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유산들을 케케묵은 것으로 다 덮어 버렸고 교회의 양적 성장과 신도수의 증가에 교회들이 목을 매었습니다. 그리고 수십년이 흘렀고 그 결과가 오늘날의 족보도 없고 근본도 없는 정체불명의 유사교회들의 득세입니다. 자격 없는 교회와 성도들의 양산입니다.

이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던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 교리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고 과거의 중요한 신앙고백서들의 번역 및 교육에 열을 올렸지만 아쉽게도 이 부분은 주로 전문신학자들의 영역이었고 그러다보니 일반 성도들의 삶의 자리에 가까이 하기는 무척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저의 서재에도 이런 책들이 꽤 있지만 우선 저부터가 보다보면 지루해지고 하품이 나니 일반 성도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아주 괜찮은 책이 나왔습니다! (이 소리를 하려고 그 긴 서론을 말했습니다.)

소개해 드리는 황희상 작가의 책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은 교리를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교리가 무엇인지, 어떤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지, 이를 통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왜 이것을 배워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교리교육을 위한 입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현재의 한국교회에는 바로 이러한 책이 간절히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매우 기꺼운 마음으로 이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처음 보시면서 앞장을 과감히 건너 뛰고 167페이지 이후(3장)부터 마지막까지를 먼저 읽으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작가와 출판사는 이것을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참고자료로 사용하기를 원했겠지만 이 내용들(주요 신앙고백서들의 탄생 배경)은 과거의 우리의 선조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 교리문답서들을 만들었는지를 이해하는 최소한의 노력이자 예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더욱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만 여기에 있는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개신교회 성도의 99%라고 거의 장담할 수 있기에 이것부터 먼저 보시고 처음부터 읽어 가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교리문답의 정신이야말로 교리 문답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고 나서 앞으로 돌아오면 저자는 두 개의 주제를 다룹니다. [왜 교리문답을 배워야 하는가]와 [이 교리문답을 어떻게 오늘날의 현장에서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교리문답의 내용을 외우는 것 이전에 반드시 숙지해야 할 근본적 질문들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실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저같은 목회자에게도 늘 가슴에 두고 사는 중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왜 배워야 하는지, 성경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떤 적실한 적용이 되는지, 성경을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는 단순히 성경지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중요한 내용들을 매우 쉽고 친숙한 어체로, 그렇지만 할 말은 다해가면서 독자들에게 다가갑니다. 저자의 논지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현실에, 그리고 교회의 자리에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과제와 사명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책의 가장 큰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 메뉴얼이 아니라 카메라로 찍을 수 있는 놀라운 세상을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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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책을 추천하는 저조차도 교리교육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교리교육은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문서라고 할 정도로 성도의 삶의 여정에 있어서는 기초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의 세계가 깊고 오묘할지라도 그곳에 이르는 문을 바르게 열고 들어가지 못하면 엉뚱한 곳을 헤메다가 끝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올바른 교리교육은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바르고 정확한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경의 세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하는 안내서(navigation)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교리교육서가 서양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이 내용을 충분히 습득하고 이해한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서양인의 사고와 세계관을 넘어 과거의 교회들의 훌륭한 전통을 오늘의 한국교회의 자리에서 충분히 소화해내고 그것을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에 적실하게 적용하는 방법을 바르게 인도할 좋은 교리문답서와 신앙고백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과거의 전통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면서 이것을 뛰어넘는 것을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늦은 감이 있고 부끄럽지만 우리는 다시 기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교리교육을 하긴 해야 겠는데 뭘 어떻게,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분들에게, 그리고 교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교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교회와 성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알기 원하는 분들께 이 책은 좋은 입문서이자 가이드가 되어 줄 것입니다. 이 책을 완전히 소화해낼 때쯤이면 교회들은 좋은 교리교육 선생님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부디 한국교회에 올바르고 훌륭한 좋은 교리문답 선생님들과 이를 충실히 배우고 익히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후대의 우리 교회들은 잘못되고 어그러진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올바로 살게 되는 [교리가 삶이 되어 있는] 성도들로 가득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권영진 목사(정언향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