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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프로젝트/히스토리(history)

기독교인이 세계사, 특히 근대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기독교인이 세계사, 특히 근대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근대 혹은 근대사상이라고 하면 교회에서 대번에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인본주의', '사탄의 술책', '조심해야...'. ‘근대사상이라니, 우리는 오직 성경인데’ 이렇게 자꾸 대응합니다. 저도 대학 때 한참 세계관 공부하고 책 보고 그럴 때는 근대 이후의 사상은 싸잡아서 그냥 다 악한 세력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상. 물론 맞습니다. 어느 정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당연히 전체적인 흐름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신관, 계시론에 대한 저항 정신입니다. 천 년 이상 정답이라고 믿던 기존 생각과 기존의 모든 가치관에 대한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이 발전할 원동력도 되었던 것이구요.

네, 그렇긴 한데, 그 모든 것을 싸잡아 정죄할 순 없겠다는 것이 그 이후 바빙크 등의 제대로 된 개혁신앙의 선배들을 공부하면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일반은총의 가치와 한계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는 그 이후 살아오면서 절실히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 사상 자체에도 이미 그런 저항정신이 담겨있습니다. 르네상스가 있고 나서 종교개혁이 있었으며, 몇몇 개혁자들의 외침을 수많은 성도들이 '이해'하고 '동감'하여 '연대'하고 '헌신'하기까지는 르네상스가 깨우친 새로운 정신이 깔려있었기에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 개신교 귀족들은 책을 읽었고 책을 출판했으며 교육시스템과 박물관을 세웠고 과학자들을 후원했습니다. 이것을 사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근대사상 안에서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기독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자는 게 아니라 결국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자는 겁니다.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기독교 세상을 만들고 기독교 국가를 만들어서 기독교를 안 믿는 저 이단자들을 처단하고 타종교인을 핍박하자는 게 기독교 세계관입니까? 그런 세계관은 정확히 근대 이전, 즉, 중세 십자군 시대의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한 세계관인데,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너무도 쉽게 발견됩니다. 저는 ‘우리에게 기독교 세계관이 있는가?’라고 자문했을 때, 쉽게 '그렇다'라고 답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 그런 거 없다'라고 단언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할 듯합니다. 자꾸 우리가 뭔가 제대로 생각을 할 줄 안다고 착각하고 섣불리 그것을 적용하니깐, 인터넷에서 욕을 먹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정말로 아직은 우리가 능력이 안 된다는 걸 깔끔히 인정하고, 정말로 차근차근 바닥부터 다져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교리를 잘 공부해야 합니다. 교리적인 기초를 가지고 세상을 보는 운동을 했어야 되는데, 그간의 우리 기독교 세계관은 그렇지는 못했단 자성이 듭니다. 2~30년 전 옛날 기억이지만, 제가 대학생이던 시절(라떼)에는 기독교 세계관 관련된 책이나 강의가 교회의 젊은 층에게 굉장히 인기였습니다. 집집마다, 아무튼 조금 과장하면, 기독교 세계관을 다루는 책이 없는 기독 청년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그런 것에 관심이 있고 세미나도 열고 그랬는데, 인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걸 통해서 우리가 똑바로 살아왔나를 보면, 그때 같이 선교단체 하고 청년부에서 뛰고 그랬던 제 친구들, 지금 교회 안 다닙니다. 그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기초를 형성하고 나서 세상에 적용을 해야 하는데 기초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 적용이 어설프게 나옵니다. 과거에 참 한심한 적용들이 꽤 있었습니다. 단군상 목을 치고... 캠퍼스 돌아다니면서 장승을 뽑고...

오늘날에도 소위 주류 기독교라 하는 자들이 광화문에서 어떤 적용을 하는지 가만히 보시죠. 지극히 단순 무식하게 이익 집단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기독교랑 스타일이 안 맞는 적수가 나타나면 아무 데나 들이받습니다. ‘니가 감히 하나님에게 덤벼?? 죽기까지 싸우리라' ... 하지만 막상 필요한 순간에는 꽁지를 빼고 말을 바꿉니다. 이런 것들이 누구를 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적어도 제 나이 이상, 저를 포함한 세대들의 반성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그래서 지난 시간동안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적인 프로토콜 확보를 위해서 교리교육에 다소나마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게 먼저 되고 나면 기독교 세계관이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지, 세계관 운동을 한다고 해서 기적처럼 어느 날 우리 눈에 뿅 하고 장착되고 그러는 게 아니란 소립니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것이 말이죠.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의 사역에 관한 깊은 통찰이 없으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볼 때마다 걱정이 심하게 들고 조바심이 납니다. '어? 이거 하나님 나라에 해로운 방향으로 돌아가네? 사탄의 활약이구나!' 느낌 좀 오시나요? 요새 또 그런 말 하시는 분들이 늘었습니다. 국회에서 어떤 법안이 진행되면 마치 사탄이 지금 이 땅을 점령해가지고... 어떤 반기독교적인 세력에 의해서 교회가 압살을 당하고 있다, 이런 인식을 갖는 모양인데, 교리를 정확하게 배우고 나면 그런 것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오히려 세상이 잘 돌아가는 하나의 흐름일 수 있습니다. 분별 해야 할 타이밍에 조바심이 나니깐 난데없이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뛰쳐나가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이해는 안 가지만 그거라도 하게끔 되는 일종의 절박함이라 할까요? 그런 마음은 알겠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어떤 뜨거운 마음은 잘 알겠는데, 비논리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문제란 겁니다.

세계관이 잘못되면 적용은 정말로 위험합니다. 문화창조든 문화변혁이든, 결국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야 인간 사회에서 무슨 적용도 하고 행동도 하는 건데 그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전적 타락의 교리를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좀 적용을 할 줄 아셔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어찌 그렇게 잘 까먹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소위 '이미'와 '아직'이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성도라면, 이 땅의 교회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보이는 교회의 가치와 함께 불완전성을 동시에 이해하는 그런 어떤 신학적인 기초를 가지고 있어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와 적용이 비로소 가능합니다.

아내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1984라는 소설을 보면, 스포일러 빼고 말하자면, 어떤 국가가 백성들을 지배하는데 '언어'의 가짓수를 줄여버립니다. 이게 참 신박한 것이, 백성들을 무식하게 만들어서, 즉, 우민화시켜서 손쉽게 지배하겠다는 것입니다. 동남아의 어느 국가에 갔더니 그곳엔 도서관이 없습니다. 국민들을 적당히 무식하게 만들어두어야 지배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들이 발전하기가 너무나도 힘든 것은 자명합니다. 그런 곳은 복음을 전하기도 힘듭니다. 정반대의 경우로 동유럽의 어느 나라는 언어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버려서, 즉 문법을 웬만한 사람은 다 깨우치지 못하도록 복잡하게 규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까막눈 국민들을 증가시킨 사례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에도 이런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제가 지금 너무 나쁘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가만 보면 교회들이 항상 하는 게 뭐냐면 맨날 기초, 초신자 교육입니다. 언제나 '새가족' 교육이에요. 발전된 교육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늘 새가족이 오거든요. 그러면 그들을 배려해야 하니까 쉬운 것을 가르쳐야 하고... 그런데 그걸 30년 40년째 배려하고 있어요. 그 새가족 배려를 누가 하냐면, 작년에 왔던 새가족이 새가족 교육만 받고 다시 합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 제대로 된 공부를 하죠? 언제 '대'요리문답을 공부하죠? 우리는 100년째 소요리문답만 공부합니다. 그것조차 안 하는 교회는 논외로 하구요. 저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좌절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좌절감도 한두 번이지, 한없이 그러고 있을 순 없기에, 뭐라도 하는 겁니다. 성경과 교리와 역사를 균형 있게 가르칠 커리큘럼을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만들고 발전 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날 누군가에게는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이 형성되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아주 많이 존재할 때, 그때 교회 개혁이 이뤄지는 것이지, 우리가 그냥 힘을 내고 갑자기 용감해진다고 해서 개혁이 되는 거 아닙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무식하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차라리 현재 우리가 무식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좀 덜 용감했으면 좋겠어요.

무식하고 용감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종교개혁 이후에 급증했던 마녀사냥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장로교회가 공식화되었던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뭘 의미하냐면, 주께서 종교개혁을 통해 우리 교회에 허락하신 참된 교회의 표지 '권징'을 갖다가 잘못된 혹은 미성숙한 세계관으로 '오용'했던 겁니다. 교회의 치리 권한이 회복된 것은 좋은데, 그럼 그 권한에 걸맞는 수준 향상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로 권력만 갖다 쓰면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답은 자명합니다. 무식하고 용감한 치리권의 남용은 마녀사냥이라는 비극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기록된 역사는 빼박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맨정신으로 겪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무슨 느낌을 받았을까요? 교회가 왜 이러지?? 이것이 교회가 맞나?? 교회가 잘못된 권징을 지속적으로 하고 한심한 모습을 보이면 교회가 싫어지겠고,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이 싫어지겠고, 그 신학이 다루는 하나님이 싫어지겠고, 그런 하나님을 외치는 사람들이 싫어지겠고, 그런 권세를 줬던 그 장로교회의 시스템이 싫어지겠고, 그것들을 산출했던 신앙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런 것들이 죄다 싫어지는 겁니다. 18세기 이후에 19세기까지 유럽에 불신자가 급증한 것이 정녕 근대사상 때문입니까? 이래도?

인본주의가 침투하고 계몽주의가 창궐해서 근대 이후에 하나님의 교회가 망가진 게 아닙니다. 천국의 열쇠권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는 교회가 스스로의 권위를 훼손한 역사가 근대입니다. 이제 근대 이후의 신자들은 하나님을 떠나거나, 그럴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 남거나 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교회를 안 떠나고 출석까지 해주면서 싫은 소리 들을 게 뭐야?'라고 생각합니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권위를 가지고 별로 아는 것도 없는 사람들이 마치 나를 다 아는 것처럼 판단하며 마녀사냥을 하려고 했을 때, 이제는 참지 못합니다. 그따위 권위에 순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권징의 실종입니다.

잘못했던 역사를 공부하는 것, 그것이 또한 바로 우리의 역사일 경우, 동심은 파괴되고, 심장은 괴롭습니다. 그래도 바로 그 지점으로 들어가서 상처를 도려내야 치료가 되고 회복의 길이 열립니다. 외면하고 덮어놓는다고 나아지지 않습니다. 적어도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알고는 있어야 교회의 미래에 소망이 있습니다. 아니, 거창하게 교회를 언급할 필요도 없지요. 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 차마 모르고 싶은 그 시절을 굳이 알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