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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프로젝트/캐터키즘(catechism)

십계명의 현대적 해석과 그 적용 - 17세기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의 도움을 받아서...

글: 황희상 / '특강 소요리문답', '특강 종교개혁사',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저자


놀라울 정도로 실천적인 대교리문답 해설 대교리문답이 제시하는 이 수많은 “의무와 금지 조항들”은 교리문답을 읽는 우리를 질리게 만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찬찬히 집중해서 문답을 들여다보면, 여기 사용된 수많은 항목들은 오늘날 기독교세계관이나 기독교 윤리, 복지, 인권, 사회참여 등에서 단골로 다루는 토론주제를 연상케 합니다.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언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교리문답에 이 같은 방식을 사용한 것은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의 작성 의도가 성도의 삶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돕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보겠습니다. 제8계명에서 무엇이 금지되었는지 대교리문답이 대답해주는 항목 가운데는 “부당하게 울타리를 치는 것과 내쫓는 것(unjust enclosures and depopulations)”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42문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게 도적질 하지 말라는 8계명과 무슨 상관이 있는 말일까요? 한 단어씩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먼저 ‘울타리 치기’라고 번역한 ‘enclosure’라는 단어는 16세기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식민지 개척과 관련하여 모직 산업의 갑작스러운 발달로 인해 양털 값이 폭등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자본가들과 지주들은 양털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앞 다투어 양들이 풀을 뜯을 목장 부지 확보에 열을 올렸습니다. 전 세계 수십 개 국가의 식민지를 대상으로 옷감을 팔아야했기 때문에 양들이 어서 빨리 잘 자라주어야 했고, 또한 편안하게 풀을 뜯을 수 있도록 넓은 목초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넓은 땅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시 중세 장원제도가 사라져가는 중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여기저기 작은 마을을 이루어 소작농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귀하신 양님들께서 식사하셔야 하는데 미천한 사람 놈들이 거추장스럽게 주변에 돌아다니면 양님들께서 불편을 느끼시는 상황인 셈입니다...... 

이런 거북한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곧바로 ‘내쫓는 것’이라고 번역한 ‘depopulation’과 연결되었습니다. 자본가들은 양들의 편안한 식사를 위해 그 땅에서 밭을 일구고 살아가던 주민들을 쫒아내기로 결심합니다. 이를 위해 우선 고리대금 등의 수단으로 영세민의 삶을 파탄시킵니다. 자본가들이 토지매입을 위해 마을 사람들의 거주지를 억압적으로 빼앗아 생산성을 증대시킨 사례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토지를 잃은 영세농들은 농토를 떠나 도시 빈민 노동자로 전락하였습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교리문답에 이런 표현이 들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당시 교리문답을 만들었던 작성자들이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석했음을 보여줍니다. 당대의 교리문답이 그 시대의 아픔을 놓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을 받는 오늘날 우리 역시 우리의 현실에 그것을 적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런 잘못은 좀 더 은밀하고 치밀하게, 좀 더 체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집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정치가들은 자신의 친척이나 이해 관계자의 사업을 밀어주기 위해서 법안을 개정합니다. 부패한 공무원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행정을 조작합니다. 이런 짓을 감시해야 하는 언론계는 재계와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공정한 저울로 판단해야 하는 사법부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합니다. 다수의 국민들은 코앞의 이익과 관련이 없다 싶으면 그냥 눈을 감아버립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기뻐하실까요? 

우리는 이런 사회 정의와 관련된 제반 문제를 충분히 십계명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교육이나 설교 강단의 분위기는, 죄를 지적하고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언급하기보다는 다분히 피상적이고 내면적인 주제에 그칩니다. 세상에서의 삶보다는 교회 안에서의 신앙과 개인 구원만을 전파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대교리문답의 십계명 해석이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과거의 당당했던 이런 방식이 오늘날의 교회 교육에서도 회복된다면, 성도들의 삶이 어떻게 될까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변화할 것입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양심의 민감한 더듬이가 살아난 자라면,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삶을 바꿀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그 밖의 계명들: 현대적 의미를 찾아서 

제5계명부터 제10계명, 즉 ‘이웃 사랑’과 관련되는 계명에 대해, 몇 가지 주제를 더 열거해보겠습니다.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는 양육, 노인복지, 요양시설 운영 등이 있습니다. 대교리문답은 5계명에 대해 다루면서, 노인 문제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5계명은 문자 그대로 하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지만, 이것을 인간관계 전체에 대한 문제로 확장하여 손윗사람, 손아랫사람, 동년배, 이렇게 세 가지 대상에 대한 계명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손윗사람으로는 국가 권력까지 올라갑니다. 그래서 국가 권력자가 하나님이 임명하신 것임을 알려주고, 그래서 존중하고 순종해야 함을 알려주되, 만약 그가 독재정치나 공권력의 남용 등을 할 경우 성도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해줍니다. 손아랫사람은 자녀뿐만 아니라 내 부하직원, 제자, 후배 등 다양한 인간관계로 확장됩니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5계명과 관련된 현대적인 주제들은 다음과 같이 확장됩니다. 인간관계 전반, 리더십(leadership), 자존감, 상담, 감정코칭, 체벌, 공권력, 독재, 공직윤리, 시위, 시민불복종, 세금, 노동윤리, 노사관계, 동료의식, 칭찬, 격려, 질투, 경쟁….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이 내용 역시 다양하게 확장됩니다. 살인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적용부터, 낙태, 기아대책 등 생명을 보존하는 적극적인 내용이 포함됩니다. 전쟁, 테러, 국방, 치안, 양심적 병역 거부, 폭력, 정당방위, 인종차별, 인권, 휴가, 주5일제, 근로기준법, 분노와 용서, 온라인 게임, 기아대책, 구호활동 시험관, 인공수정, 입양, 낙태, 생명공학, 유전자치료, 줄기세포, 화장과 매장, 사형제, 자살, 안락사, 건강관리, 알콜 중독, 약물 남용, 축산농장 시스템…. 살인을 넓게 보면 이런 부분들과도 다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가족이, 우리 자녀들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고, 교회가 또한 대답을 준비해야 할 주제들입니다. 만약 이런 부분에 대한 공부나 개념 파악이 부족하다면,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그냥 나가서 서있는 것과 같습니다. 

(혹시 몰라서 부언합니다. 지금 단어들을 제시하는 것은 ‘금지’ 혹은 ‘의무’ 어느 한 쪽으로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라 단지 주제어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제들을 해당 계명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원리는 오히려 쉽지만, 적용이란 항상 최고로 어려운 단계인 법입니다.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를 단정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기본적으로 결혼, 결혼제도 등과 관련되며, 이혼, 독신, 동거, 간통죄, 혼전순결, 혼외정사, 자위행위, 포르노, 매춘, 원조교제, 근친상간, 트랜스젠더, 동성애, 게으름, 폭식, 술 취함, 의복과 패션 등의 주제로 확장이 가능합니다. 

8계명은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절제와 절약, 환경보호, 직업, 소비활동, 보증, 착취, 고리대금, 뇌물, 강도, 절도, 납치, 장물거래, 사기, 규약 위반, 문서위조, 개발지역 투기, 매점매석 탐욕, 워커홀릭, 재개발, 토지수용, 로또, 사이버 머니, 아바타 꾸미기, 분배정의, 집단이기주의, 불공정거래, 원료자원 또는 식량 무기화 도쿄의정서, 지구온난화, 전기자동차, 친환경에너지, 민생예산, 지구온난화, 기부, 도시광산 등의 자원재활용 등,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8계명의 적용점은 매우 다양합니다.

9계명은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법정에서 거짓 증거를 하지 않으면 될까요? 일상생활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요? 우리 생각은 겨우 이런 수준에 머무르지만, 17세기 교리문답 작성자들은 성경 전체를 통해 매우 깊은 성찰을 끌어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은 9계명의 실천적 적용으로 ‘진실을 말하는 힘’을 기르라고까지 요구합니다. ‘나와 이웃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고, 명예를 보존하라’는 명령으로 9계명을 적극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을 고백할 수 있는 입과, 진실을 느낄 수 있는 마음,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기도와 훈련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것은 나 자신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적용은 항상 이웃에게도 동일하게 해야 합니다. 계명은 늘 사회 구조와 함께 갑니다. 사회 구조가 악하면 개인의 삶이 신앙으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우상을 섬기지 않겠노라며 순교를 자처한 신앙의 선배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고백하고 더욱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에 요구되고 또한 보장되어야 하는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합니다. 개인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 허위사실적시나 사실의 적시 등을 통한 명예훼손을 법과 제도로 막을 수 있어야 하며, 공직자 인사청문회에 있어서 더욱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고, 언론의 왜곡보도에 적극적으로 항의할 길이 열려있어야 하며, 프로파간다와 매카시즘이 제약을 받아야 하고,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 사회 약자나 소외 계층에까지 두루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개인은 물론 사회적인 제도의 개선을 위해서까지 노력하는 것이 9계명을 지키는 성도의 할 일입니다. 

더 나아가, 언제나 진실이 드러나고 보장받을 수 있도록,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조건 없이 보장받아야 하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헌법 제12조 4항), 묵비권(헌법 제12조 2항), 형사피고인의 무죄추정 원칙(헌법 제27조 4항) 등이 언제 어디에서나 상식이 되는 사회가 되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양심수,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는 것도 동일한 원리에서 고려할 사항입니다. 종교의 자유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자유로운 환경을 위해 법과 제도가 항상 새롭게 정비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밖에도, 허위·과장광고, 다단계 판매, 파파라치, 촌지, 대화법, 논리와 논증, 뒷담화, 욕설, 선의의 거짓말, 이력서 과장, 왜곡보도, 신용거래, 절세와 탈세의 구분, 개인파산, 개인회생, 면책, 국가신인도, 리콜제도, SNS 예절, 스마트폰 문화 등의 주제가 9계명과 관련하여 더 제시될 수 있겠습니다. 

10계명은 네 이웃을 탐내지 말라, 즉 탐심에 대한 계명입니다. 부의 축적, 자본주의, 주식투자, 투기, 연중무휴 24시간 영업, 재벌경영, 기복신앙, 복권, 쇼핑중독, 과잉소비와 탕진, 사치품, 명품 탐식, 자원고갈, 생태계 훼손, 간척과 개간, 탄소배출권, 검이불루, 다운쉬프트, 슬로우시티, 헌금 등의 주제가 가능할 것입니다. 

교리는 삶입니다. 

지금까지 몇 가지 관련 주제를 나열해 봤습니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무려 350년 전 선배들의 신앙은 관념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삶의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고, 그대로 살고자 고민하고, 연구하고, 설교하며, 교리문답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350년 뒤의 우리는 이런 주제를 보고 무엇을 느낄까요? 어떻게 반응할까요? … 부끄럽게도 우리들 대부분은 ‘낯설어’하는 수준입니다. “십계명에서 굳이 이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나?” 이렇게 말하며 귀찮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나열한 주제어 가운데, 그 용어 자체가 생소한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벌써 크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건전한 신앙인이라고 자부했을지언정, 사실은 어쩌면 삶에 대해 별다른 능력이 없는, 그런 관념적 신앙인에 그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 이것을 교육의 문제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치명적이고 시급한 문제가 됩니다. 긴박감을 좀 느껴보자는 차원에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생각해봅시다. 십계명을 공부할 때 등장하는 이런 주제들은 사실 죄다 ‘토론식 수업’으로 일반 학교에서 이미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요즘 대학이나 중·고등학교에서는 토론수업이 흔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 크리스천 자녀들이, 교리공부를 했다는 자녀들이, 세상 아이들과 똑같은 가치관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수준에 멈추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부끄럽지 않을까요? 우리는 ‘세상을 해석하고 극복하며 뛰어 넘는 수준’의 자녀들을 길러내야 한다고 평소에 멋들어진 말을 하곤 합니다. 헌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실제로는 이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이 놓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후배들이, 어려서부터 ‘지금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무얼 가르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라갈 수 있도록, 우리는 있는 힘껏 도와야 합니다.

이 글에서 소개한 수많은 주제들이 대교리문답 본문에 그대로 들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필자 개인의 관심이 투영된 것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교리문답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17세기의 표현들 역시 마찬가지로, 이미 그 시대를 반영한 결과물입니다. 이것을 우리 시대의 문제로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요, 책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위성을 넘어서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지혜가 필요하며, 함께 머리를 모아야 할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도전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