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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프로젝트/ETC

문화 변혁 vs 문화 관조 - 대학생 때 쓴 글 #기독교세계관

대학생 때 공부삼아 썼던 글이다. 요즘같으면 절대 이런 식으로 쓰지 않겠지만, 기록용으로 남겨본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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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접하고 그로 인하여 거듭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세상과 문화를 바라보는 몇 가지 상이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 문화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혹자는 성속(成俗)이원론 적인 생각 속에 갇혀있기도 하다. 필자는 세상 모든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고 강조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만, 동시에 현재 유행하는 각종 세계관 공부모임이나 훈련 프로그램의 방향이 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수많은 문화사역 단체들이 말로는 하나님 주권을 외치면서 사역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결국 또다시 인간의 공로에 의지하려 하거나, 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의 일을 개입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결과가 왕왕 생기기 때문이다.

하나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 중에서도 그것을 나타내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이것을 문화 변혁주의문화적 관조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문화 변혁주의는 우리가 흔히 들어온 하나님 나라 건설개념과도 비슷한 것으로, 현재 한국 정통 장로교 신학의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문화를 보는 크리스천의 시각이다. 수많은 선교단체와 문화사역단체가 이 신학을 전제로 한 변혁적인 생각 하에 만들어졌고 운영되고 있다. 이 문화 변혁주의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라는 표어 한 줄로 극명하게 표현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통해 그분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신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매우 자주 들어온 이야기일 것이다. 이 사상을 기반으로 한 단체들은 대부분 헌신적극성이라는 단어들을 강조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문화를 창조할 일꾼들이 필요하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역을 우리가 쓰임 받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 관조주의는 다르다. 이 자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가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 위에!”라는 말로 보다 잘 설명될 수 있다. 전자는 하나님 주권에 조사 이 붙어있고 후자는 조사 가 붙어있다. 하나님의 주권이 스스로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상이다. 문화를 변혁하고 회복시키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처음부터 나중까지 홀로 온전히 열어 가신다는 신앙이다. 중간에 인간이 설 자리는 아무 데도 없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 홀로 온전히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이루어 가시며 완성하신다는 믿음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문화 관조주의가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있는 올바른 신앙 자세라고 생각된다. 문화 관조주의가 주창하는 바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하다. 성도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의 통치를 받는 자로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 땅은 죄악도 여전히 있고 세속 문화가 대세를 이루는 곳이지만, 그러나 나그네는 궁극적으로 땅에 관심을 갖는 자가 아니다. 나그네는 목적지를 향해 계속 걸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구속받은 우리 성도를 나그네라 할 때, 우리의 목적지는 영원, 곧 안식의 처소이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 우리 힘으로 뭔가 해 보려 하지 않고,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서 그가 허락하신 삶을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불필요한 강박관념 속에 시달리지 않는다.

나그네는 또한 이 땅의 문화에 대해, 그것이 계속해서 더욱 더 타락하여 가는 것을 직시하면서, 그것이 죄의 결과임을 인식하면서, 그러나 그것을 바꾸거나 파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고, 언제나 그가그렇게 하시는 것이기에, 우리가 바꾸려고 시도한다 하여 그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우리는 세상 문화에 대해 늘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개혁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서, 모든 여건이 알맞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 뜻대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죄악 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인내하면서, 그러나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개혁을 시도해 보고, 그러면서도 그 개혁이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인식하면서,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펼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이 되어 단지 주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나그네에게는 전부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잠잠히 기다리는 겸손한 종의 자세에 더 가깝다랄까.


사실 이렇게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성도에게는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늘 나그네에게 정착을 요구한다. 우리에게 우리의 신분으로서 걸맞지 않은 행동을 늘 요구한다. 하나님의 법도와 방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밀하게 요구한다. 우리가 나그네로서의 삶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그런 유혹을 받으면, 비록 영원한 안식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야 할 우리들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누리려는 정 반대의 본성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주께서 끌고 가시고자 하는 그 영화로운 자리에 이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유혹이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결단코 그럴 수 없다.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자연히 투쟁이 발생하게 되며, 여기서 문화 관조주의의 적극성이 빛나는 것이다.

이 투쟁은 어쩌면 생명을 요구하는 것이 될 때도 있다. 문화관조주의의 바른 원리 아래 거하는 성도라면, 이때 진리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생명을 포기할 것이다. 말씀 안에서 죽고 사는 삶, 이렇게 철저하고 단호하게 죄와 싸우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그네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이 분명한데, 그것이 아닌 엉뚱한 이 땅의 법칙대로 살아가기를 강요받았을 때 - 그것이 뇌물 수수가 되었든지, 주일성수에 대한 압력이 되었든지 - 언제나 우리의 대처 방안은 분명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라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말씀 앞에서 원칙대로 순종해야 한다. 우리 신분은 나그네이며, 영원한 안식을 향해 여행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 도중에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실망하지도 낙심할 필요도 없다. 주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분명히 잘못으로 고백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또 스스로 그렇게 살려고 힘쓰되,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문화와 구조를 질서 밖에서 변혁하려 하거나 그것을 파괴하지는 않는 자세, 질서를 보존하며 나그네로서 사는 삶의 자세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그분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삶이다. 하나님 절대주권의 절대적인 신뢰,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까지도 우리가 요구받는 엄연한 진리이며, 올바른 세계관이며, 신앙하는 방식이며, 의연한 삶의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