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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 메이커/2018 미국 서부 - 봄 | 가을

[미국]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라스베거스를 떠나 그랜드 캐년까지 운전.. 아니, "크루즈"를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했지만 부분적으로는 시골 길처럼 한가로운 길을, 제한속도에 크루즈 속도를 맞춰놓고 달리는 기분은 운전이 아니라 정말로 크루즈가 맞다. 앞차도 나와 동일한 속도를 맞춘 듯, 거리가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으니 어찌나 편한지...

구 66번 국도(루트 66)를 달리는 동안에는 아내가 1시간 반 정도 운전대를 잡아보기도 했다. 처음엔 두려움에 떨더니 이내 안정적인 컨트롤을... ㅋㅋㅋ 도로 곳곳에 루트 66 표지판이 반갑다.

드디어 그랜드 캐년에  진입하기 바로 전 거점마을로 쓰이는(?) 윌리암스에 도착했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캐년까지 갈 것이다.
이곳의 명물, 전통적인 개스 주유기 모형들이 가게마다 설치되어 손님들의 눈길을 끈다.
그랜드 캐년이 있는 곳까지 또다시 시골길을 하염없이 달린다. 그런데 날씨가 꾸득꾸득 흐려서.. 슬슬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랜드 캐년 입장하는 곳에 왔을 즈음부터는 진눈깨비까지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서, 엄청난 추위까지 몰아쳤다. 지금 4월인데!!?? 당황한 우리는 차 안에 있는 모든 가방을 뒤져서 옷을 더 껴입고, 비지터센터까지 뛰어들어갔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몰려들어 날씨 정보를 보면서 웅성대고 있었다. 인터넷 날씨 정보를 보니 기가 찼다. 계곡 전체에 비구름이 꽉 찼다. 다들 비지터센터 직원들에게 언제쯤 비가 그치느냐고 묻는데, 직원들이 뭘 알겠나... 아니, 그랜드 캐년이 뭐 쉽게 오는 곳인가? 여기까지 왔는데 비가 오다니!!? 

"메이비, 원 아우어?"
"오, 리얼리?"
"오어, 원 위크??"
"ㅋㅋㅋㅋㅋ....ㅠㅠ"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일단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이러다가 또 비가 갤 수도 있지 않겠어??? 캐년 내에는 무료 셔틀버스가 노선별로 다닌다.
윌리암스에서 캐년까지 오는 기차. 이걸 타고 오는 사람들도 많다.
그랜드 캐년의 서쪽 끝 '허밋 레스트'로 가는 버스 승강장. 이제 거대한 비구름이 완전히 계곡을 덮어버렸다.
이게 뭐야.... ㅠㅠ 이것도 나름 운치는 있지만... 캐년? 그랜드 캐년은 어디 있냐고!??!? ㅠㅠ
창밖은 그저 하얀 도화지.  당황한 나는 급히 일정을 바꿔서 다음 날 가기로 되어 있는 크레이터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는 중인데... 여긴 현지 유심으로도 데이터가 안 터지는 콜로라도 고원 한 가운데였다... ㅠㅠ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신 아내님의 썩소.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는데... 갑자기 !!

어디선가 서광이 비치는 듯하더니, 여기저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비구름이 서서히 걷히면서 위와 같은 장면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뭐라고 이걸 표현해야 할까...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ㅠㅠ

아직 진눈깨비가 내리지만 캐년 저편에는 해가 비치기 시작한다.
너무도 아름다운 순간,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처음부터 말짱했다면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그 기적같은 순간!!
불과 10여분 사이에 날씨가 완전히 갰다.
마침내 드러난 그랜드 캐년!
우리는 다시 기운을 내서 아까 가보려다가 못 갔던 '허밋 레스트' 쪽으로 버스를 탔다.

그랜드 캐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비지터센터 바로 코 앞에 있는 '마더 포인트'라고 하는 곳이지만, 그쪽이 전부가 아니다. 서쪽으로 한참을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서 그랜드 캐년의 또다른 측면을 바라볼 수 있고, 또 마음에 드는 포인트가 있으면 그 정류소에서 내릴 수도 있다.

거의 대부분의 관광객은 위 그림의 동쪽 끝에서 머물다가 떠난다. 우리는 서쪽 끝까지 도착했다.
넘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다시 빌리지 쪽으로 나왔는데 버스가 서행을 한다. 사슴이 길을 건너고 계셨다. ㅎㅎㅎ 우린 바로 여기서 내렸다.
이곳이 인간의 영역이 아닌 자신들의 영역임을 과시라도 하는 듯, 우리의 시선과 접근을 개의치 않고 한가로이 자기네 볼일을 보는 사슴들을 보면서, 이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꿈인가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좀 늦더라도 석양을 보고 나가기로 했다. 떠나기가 싫었다. 숙소까지 먼 길이지만, 까짓거 야간운전 좀 하면 되지 싶었다. 석양을 볼 곳으로 정한 지점은 '야바파이 포인트(Yavapai Point)'라는 곳이었다. 이곳엔 조그마한 지리 박물관도 있다.

석양을 기대하며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몰려와 있었다.
역시나 이곳에도 전시실이 있다. 미국은 어딜 가나 자꾸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고, 우린 또 자연스럽게 그걸 배우게 된다. ㅋㅋㅋ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으로 넘어간다. 사실 이곳이 캐년의 가장자리기 때문에 해가 넘어가는 지점이 지평선이 맞지만 산 봉우리 너머로 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잊지 말자. 우리가 있는 곳의 해발고도가 높긴 한데, 우리가 높이 올라온 게 아니라 계곡이 깊이 파인 것이다. ㅎㅎㅎ
그랜드 캐년의 해가 지고 있다.
오늘 모습을 드러내 주어서 고마웠다. 친구.

숙소까지 가는 야간 운전은 좀 무서웠지만 어떻게든 잘 도착했다. 숙소는 플래그스태프로 잡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