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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프로젝트/히스토리(history)

[소설] 낯선 나라 - 황희상

by 황희상 2024. 2. 16.

낯선 나라

- 황희상
 

  


1


 
“예? 연희 엄마가 구조 요청을 해 오다니요?” 
 
한 밤중에 걸려온 국제 전화 한 통은 그동안 조마조마 간직해 온 모든 희망을 무너뜨렸다. 대사관 측 약속대로라면 연희 엄마는 이미 한국으로 향하고 있어야 할텐데…. 중국 국경 지대에서 헤매다가 구조 요청을 해오다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모두가 버려졌다고요! 베트남 군대가 국경 지뢰밭으로 쫓아냈단 말입니다. 한국대사관이 우릴 속인거요!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그것은 배신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살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북한-중국 국경을 넘어, 수만 리 중국 대륙을 필사적으로 가로질러 생명을 걸고 베트남 국경을 넘었는데, 조국 대한민국은 그들을 매정하게 내버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겨울부터, 열 달 가까이 생사를 함께 했던 탈북 식량난민 열세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국군포로의 아들 최일룡씨, 임신 5개월 째인 그 부인, 여덟 살, 열 살배기 강림이와 강설미, 한국대사관에 들어간 직후 뇌졸중을 일으켜 반신불수가 된 설미 엄마…. 연변에서 黑龍江 내몽고의 오지로, 瀋陽으로 또 베이징으로, 거기서 다시 중국-베트남 국경으로…. 총 7천km를 거치는 동안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들은 ‘굶지 않아도 되는 조국’을 찾아간다는 희망 하나로 버텨냈는데…. 
 
지난 10월 20일, 이들을 베트남 한국대사관까지 인도한 뒤 안심하고 돌아선 것이 잘못이었다. 대사관을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나를 철석같이 믿고 따라준 사람들을 오랜 고통 끝에 결국은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일까? 자책으로 가슴이 미어진다. 한국 정부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이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대사관은 당연히 이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데, 이럴 수는 없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2




“어려운 일을 해냈군요. 그런데 왜 하필 여기로 오셨습니까. 중국 대사관엘 가지 않고…. 우리만 힘들어져요.” 

지난 달, 북한 식량난민 열세 명과 함께 베트남 한국대사관을 찾았을 때 그곳 대사는 민간인 십여 명이 중국-베트남 국경을 무사히 넘어왔다는 사실에 우선 당혹스러워 했다. 사실 이 국경지대는 ‘만에 한 명’도 통과하기 어렵다는 게 통설이었다. 분위기는 심각해 졌고, 대사는 체념한 듯 말을 이었다. 

“며칠 전 탈북자 네 명을 받아서 한국으로 보냈어요. 지금 담당 안기부 직원은 데리고 한국에 가고 없고,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이 나라 정부와 약속도 했고요. 이제 또 이렇게 들이닥치시면 저흰 어떻게…. 한국 행을 위해 노력은 해보겠지만, 일이 안 되면 저 사람들 다시 처음 들어온 국경 지점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정부의 ‘선별수용’ 방침을 통보한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탈북 난민 무조건 수용 방침’을 발표한 지 한 달도 채 안되었을 때였다. 
 
“우린 여기로 오라고 해서 온겁니다! 안기부 쪽에서 이야기 안 했단 말이오? 여기까지 오는 데 죽을 고비를 얼마나 넘기고, 지금 기적적으로 살아 온거요. 그게 정부 방침이라면, 왜 당신들 우리를 하필이면 이 나라로 오라고 한 거요?” 

그때 나는 자지러지듯 항의했다. 베트남은 애초 우리가 원했던 행로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이곳을 ‘귀순을 위한 중간 기착지’에서 제일 먼저 배제했다. 국경 경비가 철통같고 북한과도 혈맹 관계에 있기 때문에, 베트남을 거친 귀순 경로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차라리 러시아 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고 빨랐다. 그런데 한국 행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안기부가 지난 9월 중순 이 나라를 지목하며 설득했던 것 아닌가. 
 

“어디요? 어디로 가라구요?” 
“…남쪽으로 가세요. 비읍이요 비읍!” 
 
도청을 우려해서 ‘비읍’이라고까지 이야기해 주는 안기부 직원의 말을 나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린 당시 더 버티기 힘든 상태였고, 귀순을 강행하기 위해 베이징 한국대사관 쪽에 공개 난입하겠다고 최후통첩을 해 논 상태였다. 이에 놀란 안기부 쪽이 중국 정부와 마찰을 우려해서 ‘복잡한’ 교섭 끝에 중간 기착지를 이렇게 설득했던 것이었다. 
 
지난겨울 북한을 탈출한 열세 명의 식량난민들은 대부분 극심한 식량난을 견디다 못해, ‘탈북은 조국을 등지는 행위’라는 사상 교육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었다. 
십 년 넘게 군복무를 했던 차도수씨는 병든 홀어머니를 업은 채 차가운 얼음장을 깨고 두만강을 건넜다. 병든 어머니를 구하는 길은 하나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차씨가 중국 공안 등에 쫓기는 사이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 헤이룽장성에 묻혔다. 
홍영실씨도 남편을 질병과 굶주림으로 잃고 함경북도 무산역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며 떠돌았다. 다른 사람이 음식을 먹고 있으면 날쌔게 빼앗아 입어 넣고 삼키고, 그렇게만 된다면 두들겨 맞더라도 좋다는 사람들을 중국 사람들은 ‘꽃제비’라고 불렀다. 그렇게 살다가 극도의 영양실조로 굶어죽기 직전 인신매매단에 걸려 ‘다행스럽게도’ 중국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종교 단체의 힘을 빌어 북한 식량난민 구호 단체의 실무자로 일해온 나는, 처음엔 이들이 중국 땅에 정착하도록 돕는 일을 했다. 한국의 북한 돕기 단체에서 보내준 돈으로 최일룡씨 부부, 차도수씨 모자(母子), 철일 ․ 형일이 가족에게 땅과 집을 사주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들의 정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회주의 중국은 공민증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을 만큼 통제가 심하다. 내가 도와준 난민들은 주민들로부터 강간, 폭행, 무보수 노동 등 부당한 대우를 감수해야만 했다. 여기에 반발하면 고발-체포-북한송환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헤이룽성 치치하얼에 정착하려던 철일이네 가족은 그 오지까지 잡으러 온 북한 체포조에게 쫓겨 마을을 탈출해야 했다. 
섣부른 도움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남쪽 사람들과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그들은 산목숨이 아니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 대한민국은 유일한 희망 그 자체였다. 대한민국은 이들에게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 공안과 북한 체포조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나는 지난 초여름 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갈 결심을 했다. 모두가 동의했다. “가다가 죽더라도…” 이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옌볜을 떠나 7천km에 이르는 기나긴 ‘죽음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들의 행보를 틈만 나면 최대한 한국에 알렸고, 한국에서 날아온 기자들과 인터뷰도 했다. 덕분에 범국민 북한돕기 운동이 일어나는 등 뜻밖의 결실도 보았다. 그러나 정작 우리 형편은 점점 어려워만 갔다. 
우리는 우선 瀋陽에서 약 두 달 정도 생활하며 행선지를 고민하다가 발길을 베이징으로 돌렸다. 귀순 신청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베이징 한국대사관은 우리들을 거부했다. 
 
“그들은 동포일 뿐, 대한민국 국민은 아니지 않소.” 
 
그것이 대사관의 입장이었다. 
 
“…중국은 지금 자국을 통한 망명을 허락 않고 있어요. 사정은 딱하지만, 중국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밀입국한 범죄자들입니다. 저희가 어떻하겠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별 도움을 줄 수 없어요. 이해하시죠?” 
 
이해? 이해하고 말고…. 문제 일으키기 싫다는. 그렇다면 국제적인 여론에 호소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우리가 대사관에 난입하면 국제 여론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 정부가 체면 때문에라도 외교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국제인권단체에 연락할 길도 생기리라…. 
예상대로 이 ‘협박’의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안기부 간부 등 세 명이 즉각 서울에서 베이징으로 날아왔다. 베이징 한 호텔에서 만난 그들은 우선 나에게 북한 주민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갈 생각 자체를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자 안기부 간부는 제발 중국에서만은 일을 벌이지 말라며, 제 3국으로 난민들을 빼내오면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나라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난 그동안 목숨을 걸고 도움을 준 현지 한국 선교사들과 함께 몽골,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 예상되는 제 3국을 모두 현장 답사했다. 이 과정에서 최 선교사님이 우리를 끝까지 돕기로 약속했고,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달 여의 답사 결과는 어떤 국경도 민간의 힘으로 뚫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기다리던 안기부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을 알려주었다. ‘비읍이 들어가는 남쪽 나라’. 베트남이었다. 아니, 어떻게 어린아이들과 임산부, 노약자가 있는 민간인 집단에게 애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시키는 것일까. 하지만 안기부 직원은 다른 방법이 없다고만 했다. 한국의 체면과 국익을 고려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숨을 건 2만리 길의 탈출. 

10월 18일 저녁, 중국 광서장족 자치주 덕천 폭포 근처. 주변은 칠흑 같이 어두웠다. 해가 지고, 달이 뜨기까지는 한시간 가량 남은 시각이었다. 흩어져 있던 우리는 ‘접선 장소’에 모였다. 너비 80여 미터의 강을 사이에 둔 반대편 베트남 국경지대에는 이미 갈아입을 옷과 밧줄, 구명 조끼 등을 준비한 최 선교사님이 도착해 있었다. 이곳을 택한 것은 강 건너편 베트남 쪽 지역이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난민들이 강을 건넌 뒤 한국 관광객이라고 위장하면 통과할 수 있겠거니 하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건너편에서 최 선교사님이 먼저 몸에 밧줄을 묶은 뒤 강물에 뛰어들었다. 물살이 거세, 강을 건너기는 목숨을 내놓은 일이었다. 힘들게 건너 이쪽 강변 나무에 밧줄을 묶으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과연 오십이 넘은 아주머니와 꼬마들이 이 밧줄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그러나 탈북 식량난민들은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쟁적으로 밧줄에 매달렸다. 그만큼 한시라도 빨리 ‘죽음의 중국 땅’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다. 
 
“선생님, 사람 죽습니다!” 
“엄마! 어디 있어!” 
 
수영을 해본 적이 없는 탈북 식량난민들. 한꺼번에 여럿이 밧줄에 매달리자 밧줄이 물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행렬은 금세 아수라장이 됐다. 꼬마 여자아이 설미는 밧줄을 놓쳐 떠내려갈 뻔하다가 일행 중 한 사람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정말 기적적으로 모두 무사히 강을 건넜다. 이제 새 옷으로 갈아입고 관광객 행세를 해야 한다. 

하지만 밤의 상황은 낮과 전혀 달랐다. 낮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곳에 군인들이 빼곡했다. 결국 일행은 “정지” 하며 총구를 들이대는 베트남 변방부대에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밤. 베트남 국경 경비부대 본부. 일곱 명의 변방부대 조사관이 나를 인솔자로 봤는지 혼자만 집중 조사했다.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경비초소에 갇힌 채 밖에서 문을 잠근 상태였다. 

 
“중국에서 넘어온 것 아니냐.” 
 
조사관들의 질문은 집요했다. 
 
“우리는 한국 관광객이다.” 
“낮에 폭포로 들어갈 땐 두명이었는데 왜 나올 때는 15명이나 되느냐“ 
“나머지는 또다른 길로 폭포에 오다 차가 고장나 폭포에서 우리와 만난 것이다. 도대체 8살?10살짜리 꼬마와 임신부가 있는데 80m 너비의 강을 어떻게 건널 수 있다고 보느냐.” 
 
나는 베트남에 여행 온 게 죄냐며 소리도 지르고, “한국대사관에 보내달라”고 강경하게 항의도 했다. 7명의 조사관은 실제로 아이들이 있는지 초소에 확인을 한 뒤 태도가 누그러졌다. 노련한 그들로서도 아이들이 그 험한 강물을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고비를 넘겼다.


나는 아직도 ‘베트남으로 가라’는 지시가 안기부의 ‘살인 명령’이었다고 믿는다. 비록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모두 중국과 제3국 국경을 넘었지만 나는 이것을 순전히 기적 탓으로 여긴다. 중국-베트남의 모든 국경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변방도로 외에는 대인지뢰와 독사가 우글대는 정글지대다. 또 변방도로는 1km 안에 10명 이상의 군인이 배치돼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을 밤에 몰래 통과한다는 것은 거의 100% 죽게 되어있다. 지뢰를 밟거나 독사에 물리거나, 다행히 그것을 피해도 경비대의 총이 기다린다. 
뒤에 들은 얘기로, 안기부 직원 한 명이 탈북 난민 한 사람을 데리고 이 국경을 넘다가 국경 수비대에게 잡혀 옥살이를 했고, 그 바람에 안기부가 꽤나 곤욕을 치렀다는 곳이다. 잘 훈련된 공작원도 그런데…. 안기부는 그러나 꼬마들이 포함된 민간인들에게 그곳을 넘으라고 지시했다. 
국경을 통과하고 베트남 한국대사관에 들어가기 직전, 나는 서울의 안기부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기부 직원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에야 나는 안기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그 안기부 직원의 목소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3



“당신네들, 베트남 정부하고 검은 거래 한 거 아니오?” 
 
나는 이미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일이 커지면,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판 붙어야 할 형국이었다. 외무부 직원 나승모씨는 개인적으로도 잘 아는 사이였다. 40이 넘었지만 청년 같은 인상을 주는 그는 벌개진 얼굴로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북한 식량 난민에게 한국에서 보내주는 구호 물자를 전달하는 일을 하게 된 때부터, 나씨는 여러 모로 도움을 주고 정보도 전해 주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동안 마음속으로나마 감사함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사람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대들고 있다. 
그렇게 사선을 숱하게 넘어왔건만, 조국의 대사관은 이들을 아무런 신변보장도 없이 베트남 당국에 넘겨줬다는 말인가. 이들은 곧바로 베트남 군대에 의해 인접국 국경 지뢰밭으로 추방됐다고 했다. 한국대사관이 베트남에 의한 식량난민들의 추방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이번 사건의 진상을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고리가 될 것이었다. 나는 끝까지 추궁할 필요를 느꼈다. 
 
“가만 좀 계셔보세요…. 왜 꼭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베트남 정부가 보안상 이유로 그 사람들을 건네줄 것을 요구했단 말예요. 11월 9일, 베트남 정부에 넘겨준 것도 확인했고, 그 뒤로도 그쪽에선 잘 있다는 얘기만 해왔단 말입니다…. 우리는 열흘 뒤에야 겨우 추방당했단 것을 알았고, 그래서 내가 다음날 바로 전화 드렸던 것 아니오.” 
“이것 보시오, 대사관에서 자기가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을 딴 나라 정부에 보내면서 신분 보증 각서도 하나 받지 않았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오?” 
“그쪽에서 만약 우리 몰래 그 사람들을 추방했다면, 이것은 베트남하고 국교 단절까지도 고려할 문제예요. 그쪽 사람들이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겠어요?” 
“아, 그래요? 그럼 진짜로 베트남하고 외교 단절을 해야겠구만요? 일이 그렇게 벌어졌으니까!” 
“베트남에서 그때 프랑스어권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어서, 그쪽 요청을 거부하기 힘들었어요. 그쪽도 의심 많은 나라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인데, 저희들 어려움도 좀 생각해 주셔야지요….” 
“우리가 처음 한국대사관에 들어갔을 때, 대사 그 양반이 왔던 곳으로 다시 돌려보낼 수 있다고도 언급했어요. 또, 그 사람들 무려 이십 일 동안 안기부 안가에 있으면서 그저 딱 한번 진술서만 받고…,” 
“저희는 그때 그 사람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어요. 알 만한 분이 자꾸… 지금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한국 행을 위한 조처가 뭐 하나 이뤄진 게 있단 말이오? 난 당장 언론에 공개할 생각이오.” 
“당신 지금, 굉장히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두세요. 적어도 우리 외무부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베트남 쪽에 한국대사관하고 베트남 정부 사이에서 짜고 한 일이라면 몰라도, 외무부에서 뭘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래요? 그것이 대한민국 정부가 할 소리요? 그러니까, 대사관에서 저지른 일이지 내 책임은 아니다? …아주 기가 막히는구만!” 
 
믿을 수 없다. 최선교사님이 보내준 일지에 따르면, 탈북 식량난민들이 베트남에 강제로 넘겨질 때 소지품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 어디론가 실려갔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 중 한 사람인 차도수씨가 한국대사관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열흘 동안, 안기부가 이들의 안전에 대해 확인조차 안 했다는 점도 말이 안 되는 부분이었다. 외무부에서는 정상회담 기간이라 조심스러웠다는 둥, 국가 체면 운운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직무 유기인 것이다. 만일 한국대사관 주장대로 베트남 정부가 상의도 없이 이들을 추방했다면 이는 외무부 나승모씨 표현대로 베트남과의 ‘국교단절’까지도 고려할 사안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대사관과 베트남 정부 간의 검은 약속이 존재한다면 이는 한국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힐 일이다. 
 
엇갈리는 주장들을 진실성을 밝혀줄 수 있는 곳은 베트남 정부밖에 없었다. 최 선교사님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지만, 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아예 사건 자체를 ‘모르는 일’이라고 철저히 부정하고 있었다. 양쪽에서 전혀 몰랐다고 잡아떼고 있지만, 그것은 구조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은 자꾸만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뭔가 증거가 필요했다. 
 
급히 중국으로 건너가 연희 엄마를 만났다. 최선교사님이 마련한 비밀 아지트에 그녀는 숨어있었다. 연희 엄마는 한국대사관에서 베트남 관계자에게 인계된 바로 다음날 국경지대에 추방됐다고 했다. 

“베트남 내무부 관계자가 그랬어요. 한국 정부에서 우리들을 받지 않겠다고 해서 추방 할 수밖에 없다고요…. 말씀 좀 해 주세요. 지금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예요?” 
 
예상이 맞았다. 이들은 11월9일 아침 베트남 정부로 조사를 받으러 가야 한다며 한국대사관 직원들에 의해 차에 태워졌다. 차는 베트남 정부 내무부로 이동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직원들은 하나씩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어느새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베트남 정부 사람들만이 주변을 에워쌌다. 오후 1시께 다른 차에 태워져 오후 6시께 국경도시 랑손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군대 막사가 있는 곳까지 끌려가서 중국 국경으로 추방됐다. 물론 얼마 못 가서 중국 변방부대에 잡혀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중국 변방 경비대 군인들은 우리 모두를 차에 싣고 가다가 산길에서 내리게 했어요. 총구로 등을 밀어서 다시 베트남으로 내몰았지요. 저녁엔 또다시 베트남 변방군인들에게 잡히고…. 남자들은 모두 손에 족쇄가 채워졌어요. 형일이 엄마는 두 아들이 족쇄에 채워져 끌려가는 것을 울며 뒤따라가다 정신이 나가 계속 토하고요. …다들 정신이 없었어요. 이불 한 장 없는 실내 창고에 갇히자 송춘옥씨가 뱃속의 아이가 발길질을 한다며 한숨을 쉬었어요.” 
 
핑퐁 공 넘겨지듯이 중국과 베트남 군에 의해 양국 국경 왔다 갔다 하기를 두 번. 끔찍한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전에 강제 추방을 맡았던 베트남 책임자가 다시 왔어요. 그는 한국 정부가 당신들을 받겠다고 하면 2~3일 내에라도 한국에 갈 수 있지만 받지 않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했어요. 형일이 엄마가 베트남 말을 조금 할 줄 알아서, 북조선에 넘기면 우리는 쇠갈고리에 코와 손이 꿰어져 짐승처럼 끌려가 죽는다며 애원했고, 모든 사람들이 울음바다가 되었지요. 그러나 헛수고였어요. 오후에 다시 서너 명씩 달라붙어 강제로 끌어내더니 호송차에 태워 다시 추방되었어요.” 
“그래서 또다시 모두들 중국 군대에게 잡힌건가요?” 
“아뇨. 내가 맨 마지막에 추방됐는데, 나를 잡은 중국 군인은 ‘나머지 여덟 명은 어디 갔느냐??고 물었고, 내가 갇힌 군부대에도 나 혼자뿐이었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길을 벗어나 지뢰밭쪽으로 도망간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떻게 중국 군부대에서 풀려났죠?” 
“계속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했더니 다음 날 아침 군인 몇 명이 내 쪽을 쳐다보며 상의하다가 부대 밖으로 내보냈어요. 나는 이 사람들이 보여준 지도에서 북조선을 가리키며, 나는 그곳으로 가면 죽는다며 내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기도 했어요. 아마도 내 처지를 불쌍히 여긴 것 같아요. 군부대에서 풀려난 뒤 길바닥을 헤매고 있었는데, 한 한족 할아버지가 도움을 줘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어요. …그분 덕택에 최선교사님께 전화 드릴 수 있었고요.” 
 
연희 엄마를 겨우 진정시키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신문사에 연락했다.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일단 알리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부에서 언론 쪽까지 손을 쓰지 않았다면, 특종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마음을 차갑게 진정시킨 상태였다. 
 
“…정치부 정태영 기자 좀 부탁합니다.” 
“잠시만요. …전화 돌려드리겠습니다.” 
 
평소 안면 있는 정태영 기자를 찾았다. 통일강냉이 단체에서 일할 때 언론 쪽에서 도움을 많이 받은 적이 있었다. 
 
“정태영입니다.” 
“나요. 강냉이.” 
“아, 오랜만이네요. 한국이신가요? 언제 입국하셨어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 아시죠? 사슴이 사냥꾼에게 숨겨달라고 애원했을 때, 엉뚱한 나무꾼이 하나 있어서, 나뭇짐 사이에 숨겨 줘 놓고는 사냥꾼이 왔을 때 알려줘 버린다면? 그때 사슴은 어떤 기분일까요?” 
“네? … 지금 무슨 말씀이시죠?” 
 
2시간 뒤, 집에서 만난 정 기자는 이것저것 자료들을 정리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젊은 사람이라 그런지, 이런 일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일단 사실 확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제가 위엣 사람들에게 보이고, 기사화 시키도록 할께요. 사실이라면 이건…. 음, 그러니까, 외교 마찰을 우려한 한국대사관이 임의로 그들을 내쫓은 것이라면, 김영삼 정부는 대국민 사과까지 해야 할 일이죠…. 한국 쪽하고 사전 밀약이 없었다면 베트남이 이들을 그렇게 취급할 수 있었겠습니까?” 
 
갑자기 어지럽다…. 어쨌든 이건 정부 차원에서 비인도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엉망진창인 탈북자 대책을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큰 사건이 될 일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정기자는 흥분하여 떠들어댔지만, 내 관심사는 지금 난민들의 생사 여부에 있다. 나는 오랜만에 쇼파에 기대앉아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며칠 뒤 저녁, TV 뉴스에서는 아나운서가 황장엽씨의 망명 소식을 떠들썩하게 전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중국-일본-미얀마와의 총력 외교전을 벌여 2주만에 그를 완전히 귀국시켰다고 했다. 화면에는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황장엽씨와 주변을 둘러싼 까만 양복의 경호원들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 기자 회견장에서 손을 흔드는 황장엽씨의 건장한 모습과 연이어 터지는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은 식량 난민들의 얼굴이 황장엽씨의 얼굴과 자꾸만 오버랩 되었다.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END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낯선 나라 / 지은이 황희상 (1998. 8. 4. 전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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